[리뷰] 얼마나 닮았는가 : 책 '마이그레이션'

글 입력 2023.06.2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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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제비갈매기.

 

이름부터가 낯설었다. 몇 주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국 새 이름 다섯 개 말하기'라는 제시문에 참새, 벌새, 뻐꾸기를 떠올리다 말았으니 당연한 건가. 세 단어로 쪼개보면 나름 친근하다. 북극, 제비, 갈매기. 그러나 도심의 빽빽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느 독자에겐 여전히 멀찍해 보였다. 이때 간극을 메우는 건 이야기의 몫이다.


얼핏 책소개를 훑었다. 새를 연구하는 주인공이 북극제비갈매기를 쫓아 무모한 항해를 해나가는 내용 같다. 책 뒷면에 '동물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문장을 보아 


그럼 어떤 이유로, 왜, 이런 상황을 자처하는지 그의 여정을 들여다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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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 구성은 단조롭다. 별다른 소제목 없이 3개의 장이 이어진다. '막'과 '장'의 차이점을 이 소설을 통해 느꼈다. 전자는 무대의 커튼이 열렸다 닫히고, 새롭게 열리는 기분이 든다. 소설 속 발화자, 즉 주인공이 달라지거나 과거나 미래로 시간이나 공간 등 환경이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장'에서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페이지를 넘긴다는 느낌 그대로 한 장, 두 장, 세 장. 주인공의 이야기가 점점 더 깊이 드러난다.


이 구조를 택한 건 아마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일 거다. '나일'이라는 이름의 남편이 주요 등장인물인 4년, 6년, 8년, 12년 전의 기억과 북극제비갈매기를 따라 항해하는 사기니호에서의 지금 생활. 흥미로웠던 건 과거의 기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지난 일은 얼마나 쉽게 흐려지고 잊히던가. 하물며 몇 년 전 일이라면 파편처럼 일부만 남은 게 당연하다. 과거의 이야기는 대체로 호흡이 짧아서 정말 누군가의 기억이 활자화된 것처럼 읽어나갔다.

 

 


1장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의 숫자와 종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며 한 푼 벌기에도 힘겨운 에니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 사실 물고기는 옛적부터 인간이 아닌 새의 먹잇감이었으므로 프래니는 북극제비갈매기의 동선을 따라가면 막대한 물고기를 수확할 수 있으리라고 설득한다. 자신이 손톱만큼 자그마한 추적기를 세 마리에 달아놨고, 새들은 물고기가 있는 곳을 기막히게 찾으러 갈 것이며, 그런고로 자신도 배에 타야 한다고.


이미 7명의 선장들에게 거절 당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데다가 이 선장이 끄는 배 이름이 '사가니'였다. 까마귀라는 뜻으로,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 있던 프래니는 더더욱 사가니호를 타고 싶어 한다. 뱃사람은커녕 배에서 생활해 본 경험도 없는 초짜를 무턱대고 들일 이유는 없다. 게다가 추적기의 위치를 표시하는 빨간 점은 노트북이 하는 일이라 프래니 자체는 있으나 마나 어떠한 도움도 될 수 없다. 에니스 선장도 그것을 알고 지적한다.

 

하지만 프래니는 간절하다. 배우라면 배우고 하라면 다 할 테니 제발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쓸모없는' 프래니가 배에 동승하자 선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존재가 무작정 들어왔으니 말이다. 다만 선원들은 선장의 결정을 수용한다. 납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배를 이끄는 선장의 판단을 믿기 때문에. 암초며 폭풍우며 해류며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바다에서 그들 모두의 목숨을 책임지는 존재이니 그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감히 배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생물체를 존중하고 지키려는 프래니와 생물체를 포획해 팔아넘기려는 어업 종사자의 이해관계가 꽤 잘 들어맞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비슷한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고.

 

 

삶의 영향력이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남겼느냐로 측정될 수도 있지만,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로 측정될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p.164

 

 

손가락에 피가 철철 나도록 매듭 묶기를 종일 반복하던 프래니. 새를 찾아간다는 그의 발상이 흥미로웠던 건지 혹은 그의 노력이 가상하다고 여겼던 건지, 아니면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들던 건지 선원들과 프래니는 점차 가까워진다. 그들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만큼 독자는 프래니의 이야기에서 의아함을 발견한다.


남편을 왜 떠나게 된 건지, 그에게 왜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하고 적기만 하는지, 딸아이는 어떻게 된 건지. 무의식 중에 어렴풋이나마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어째서인지. 그가 가족을 헤친 걸까? 프래니가 대다수의 새가 멸종된 세상에서 북극제비갈매기에 집착하는 게 정말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건가. 늘어나는 물음표를 뒤로한 채 다음 장이다.


 

 

2장


 

이 장에선 프래니와 관련한 많은 비밀이 풀리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할머니와의 일화다. 할머니는 완고하고 엄격한 성격으로 묘사되는데 실의에 빠진 프래니를 달랠 때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항상 세상이 돌아가진 않아. 그리고 우리는 고상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지."

 

p.259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맞는 말인 건 분명하지만, 프래니의 슬픔과 억울함으로 점철된 감정을 달래기엔 적절치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방향을 틀었을 즈음에 그 또한 프래니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우연히 알게 된다. 똑같은 마음인데 대응과 표현방식이 달랐을 뿐.


사실 우린 모두 똑같은 거 아닐까? 종종 해왔던 생각이다. 나 자신을 나은 사람으로 만들며 멋지게 살아내고 싶은데, 저마다의 이유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겉보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할머니와 프래니가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다르게 표출했듯이 우리는 똑같은 단어도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 오해의 대부분은 본래의 의도와 좀 더 뒤틀린 해석에서 시작되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신체로 감각할 수 있는 부분만 사실이라고 믿고, 자신과 정반대의 부류의 주장엔 특히 거부감이 심하기 때문에 절대 타협의 선을 내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좁혀질 수 없을 거리엔 의외의 징검다리가 있다. 이곳의 사람들을 예로 들자면, 선원들과 나일은 양극에 서있다. 선원들에게 물고기는 생물체가 아닌 단순한 돈벌이이고, 뭐가 되었든 최대한 많이 포획하여 무사히 내다 파는 것만이 목적이다. 새 연구자인 나일에겐 이러한 생물체들은 보존하고 지켜야 할,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중한 존재다.

 

그러니 만약 나일처럼 강경하게 새를 보존하고 아끼는 사람이 북극제비갈매기를 보러 나섰다면, 절대 청어잡이 선체엔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 프래니는 나일과 비슷한 입장이긴 해도 북극제비갈매기를 보러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에 일정 부분 어업 종사자들과 교집합을 나눈다. 야트막한 교집합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한다. 가족들을 위해 일평생 해온 노동을 붙들어야만 하는 에니스, 그런 에니스 덕분에 목숨을 구한 후론 그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아닉, 마찬가지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애쓰는 평범한 선원들, 아니 사람들.


각자 살아온 이야기에는 하나의 인간이 그대로 담겨있어서 그 자체로 울림을 준다. 그렇기에 프레니가 생명을 소중히 대하는 자세 또한 그들에게 퍼져나가며, 어느덧 활강하는 새의 자태에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을 테다. 우리는 참 비슷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누구든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곱고 예쁜 말 혹은 한 번에 알아듣기 쉬운 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귀를 꾹 막는 순간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생긴다.


 

 

3장


 

그 선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그은 게 아니다. 인간이 다른 종을 대할 때도 같다.


 

순전히 인간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를 바탕으로 특정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실용적일지라도, 애초에 그런 태도로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p.356

 

 

앞서 사가니호에 합류한 프래니에게 '쓸모없는'이라는 수식어를 일부러 붙였다. 우리는 참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선택지가 다양하다. 그 많은 것들 중 자신에게 좋은 것을 택하기 위해선 자연스럽게 기준이 생기고, 대개는 효율을 가장 먼저 말한다.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추려 곁에 두기로 하여.


이러한 구별법은 약자와 강자의 촘촘한 위계를 만든다. 단순히 둘로 나뉘지 않는다. 강자 중에서도 최강자가 있고, 최강자 중에서도 더 강한 자가 있고,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자가 있고, 그보다 조금 더 약한 자가 있고,... 인간이 끝없이 쌓아 올린 고층 건물의 모양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땅 위와 하늘 아래,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기에 결과물은 반드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를 가르던 잣대를 다른 종 앞에 똑같이 들이밀다 보니 체감할 수 있을 만한 정도가 아니면 모조리 무시한 결과가 지금이다. 산불이 온갖 데서 나고, 개화 시기가 한 달이나 앞당겨지고, 이례적인 최고 기온을 갱신하고. 대처방식은 여전하다. 일단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을 포함해 예측 가능 범위 한에서 대비한다. 불을 끄고, 방파제를 높이고, 에어컨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가동하는 식으로.


생명체는 모두 살고자 하는 의지로, 인간은 더 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근본적으로 모두 같음을 알면 해결은 의외로 쉬울지 모른다. 무엇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말고를 따질 시기는 이제 지난 게 아닐까. 인간이 무엇을 해야 자연에게 도움이 될까. 세상의 주인이 바뀌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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