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반구 바다에서 한 마리 연어가 되었다

글 입력 2024.03.0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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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과 최선 그 너머에 정답이 있었다. 교환학생에 가는 것. 무모하게 1년 휴학을 하더라도 '도전을 해봤냐', '그저 포기했냐'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낸다. 그저 한 학기 교환학생에 간다고 1년을 준비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늦은 일 또는 큰 도박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럼에도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휴학을 해서라도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 언어를 배우고, 새 문화를 습득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으면. 그 준비하는 1년은 오히려 그 어떤 해보다 값진 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나의 경로를 완전히 뒤바꾼다."

 

이전화 : 2년 휴학생은 왜 호주 교환학생을 갔을까 


 

어느덧 호주에 와서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한 지도 한 달이 흘렀다.


첫 일주일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인식하는 데에만 몰두를 했고, 2주차에는 가족과 시드니 여행을 하며 눈 깜빡할 사이에 풍요로운 황금기가 흘러갔다. 3주차에는 진정 홀로 남아 교환학생 수업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4주차, 이곳에서 진정한 라이프 스타일을 갖추는 데 온 정신과 시간을 쏟고 있다.

 

호주에 꼭 오고 싶었던 이유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영어, 자연, 그리고 안전.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와서 이 세 가지의 기쁨과 진가를 모두 감각하고 있다. 한 달이 지나고 보니 내가 기대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펼쳐지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걸음마를 떼는 아기의 발걸음을 닮아보자



먼저 영어에 대한 느낀 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무조건 부딪혀야 한다". 많이 틀리고, 많이 말해봐야 한다. 무조건 틀릴 수밖에 없다. 틀려야, 반드시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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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생으로서 마주치는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언어다.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일 테다. 아니, 사실 언어가 전부일 수도 있다. 들리지 않거나 말하지 못하면 이 세상과의 소통에서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영어를 말하고 뱉을수록 선명히 느낀다. 무조건 많이 듣고, 귀 기울여 듣고, 거침없이 내뱉어야 실력이 늘어난다. 

 

어릴 적 모국어를 배울 때를 생각하면 쉽다. 넘어질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저 듣고, 들은 것을 조합해서 따라 해본다. 그것이 부적절한 어순이나 표현일지라도 말하고 보는 그 용감함이 필요한 것이다. 영화감독 윤가은의 산문 '호호호'에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투명하게 담겨있는데, 그가 말했듯 '두려울지언정 과감히 시도해 보고 틀리면 수정해 나갈 용기가' 우리에겐 절실하다.

 

 

"확실히 어린이들은 새말을 익히는 과정에서 필히 겪을 수밖에 없는 실수나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두려울지언정 과감히 시도해 보고 틀리면 수정해 나갈 수 있는 엄청난 용기가 있는 것도 같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그렇게 쉽고 빠르게 새로운 말들을 익히고,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용감한 마음을 닮고, 배우고 싶어졌다."

 

윤가은 산문, '호호호' 중에서 p.31


 

한 달 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급기야 나는 한국어를 어떻게 맛깔나게 말하는지 잊어버린 느낌이 문득 든다.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이 제2의 언어로만 돌아가는 그 생경한 감각. 그것을 매일 매 순간 피부로 느낀다. 

 

현지인이나 교환학생들과 이야기할 때는 최대한 영어로 생각하고, 사고하려 부단히 애쓴다. 그것이 설령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라도 일단 말한다. 한국어 어순이나 표현을 생각하는 순간 영어를 관장하는 뇌는 불빛이 흐려질 테니까. 이 덕분에 체감상 더 빠른 속도로 현지 영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몸짓과 표정, 자세, 손짓까지 포함하는 비언어적 표현도 쉴 틈 없이 자동으로 익히고 있다. 호주에서 매일 "How are you", "how's it going"을 숨 쉬듯이 말하고 나니, 이제 한국 사람을 보면 어떻게 첫인사를 해야 할지 버벅거릴 때도 있다. 제2의 언어를 쓰지만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호주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나조차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궁금해하는 문화. 그것이 설령 10초뿐일 조우일지라도 그 순간마다 이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반구의 바다에서 한 마리의 연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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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경험한 모든 자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다름아닌 바다였다. 2주 전 맨리 비치에 갔을 때, 마치 한 마리의 연어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워터파크에서 비교한 파도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의 파도를 경험하고 왔다.

 

파도를 맞이하는 처음에는 짜디짠 바닷물이 코 끝까지 들어가서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온 몸에 이상 반응이 왔다. 어떻게 뛰어들어온 바다인데 오자마자 물 밖을 나가고 싶어졌을까. 그러나 생각할 시간도 없이 파도는 제멋대로 나를 잠기게 했고, 몇 번의 헛구역질 끝에 결심했다. 바다에서는 쓸데없는 힘을 주지 말자고. 목, 어깨, 다리에 주고 있는 힘을 다 풀어버리자고. 

 

숨 고를 틈도 없이 세차게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 거대한 자연 안에서 한낱 귀여운 인간인 나는 굳이 몸에 힘을 줄 필요가 없다'. 그때부터 바다와의 진정한 조우가 시작됐다.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폴짝 뛰어오를 타이밍을 익혔다. 감당할 수 없이 큰 파도가 겹겹이 덮쳐오면 아예 그 파도 속으로 몸을 던져버렸다. 한 마리의 연어처럼, 혹은 고래처럼. 머리 위로 물을 뿜어낼 수는 없지만 파도에 풍덩 들어간 그 순간에는 나도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 

 

웅장한 바다의 일부분이 되는 초월감에 온몸의 감각을 맡겼다. 수영을 잘하지도, 바다 수영에 능숙하지도 않지만 그날만큼은 그저 바다에서 헤엄치는 한 마리 연어나 거북이가 된 느낌이었다. 자연이 온전히 나를 감싸고, 내가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그 경이로움을 처음으로 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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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반도의 35배나 큰 국토 면적을 지닌 호주. 국토의 대부분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기후를 가지고 있으나, 내가 사는 시드니는 호주 최고의 인구 밀집 지역이다.

 

반갑게도 시드니에 살면 내 고향인 서울에서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 반경임을 느낀다. 버스와 메트로, 트레인, 페리 등 대중교통이 워낙 잘 되어있는 점, 시티 중심에는 높은 빌딩이 모여있는 점, 심지어 크나큰 또는 진화된 버전의 한강을 떠올리게 하는 세계 3대 미항의 아름다움까지. 다만 서울과 가장 큰 다른 점은 바로 곳곳에 드넓게 펼쳐진 '자연'이 아닐까. 늘푸른 국립공원과 뿌리 깊은 나무들, 곳곳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식물들은 호주만의 역사와 환경을 대표한다.

  

한국에서 호주로 비행기를 타고 올 때 '멀어도 너무 멀다'고 생각했다. 태평양 한가운데를 지나, 시속 900킬로의 비행기가 날아가고 또 날아가도 10시간이나 되어서 도착하는 호주의 땅덩어리. 그만큼 다른 대륙들과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영겁의 세월 동안 호주만의 독특한 생태와 자연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동식물들을, 호주는 비교할 수 없이 무수하게 보유하고 있다.

 


 

태양의 시간에 나의 일과를 공전하는 방법



아침 6시부터 비치에 나가 일출을 봤다. 붉게 이글거리는 태양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가 머리를 내보이는 그 시간 전부터 서핑보드에 올라타는, 가족과 여유로운 식사로 휴일을 시작하는, 뜨끈한 태양빛을 맞으며 바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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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보며 태양의 시간에 공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일과. 호주에서는 보통 오전 7시에 식당을 시작해서 이르면 오후 3-4시에 문을 닫는다.  


한국은 반대다. 낮보다도 밤이 더 불타오르는 곳이다. 태양이 지고 나서야 제시간을 즐기는 저녁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관광지에 가도 일출보다 밤바다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처음에는 아리송했지만 점점 갈수록 익숙해지고 있다. 왜 호주 사람들이 여유롭고 대체적으로 친절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 이들에게는 '일'을 제외한 자신의 온전한 삶이 있다. 태양의 온기를 느낄 시간, 바다에 뛰어들 시간. 비치에 누워 책을 읽을 시간. 


이들의 라이프를 경험하면서 삶은 '어떤 시간에 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풍경을 지니고 있다고 느꼈다. 해가 뜨는 새벽에만 보고 느끼는 것, 해가 중천에 떠있는 정오에만 감각하는 것, 해가 지는 일몰에만 스치는 생각들.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풍경을 나도 함께 공전하고 있다.

 


[신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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