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을 돌렸다.
삶의 낙은 집에서 일 키로 떨어진 대방 할인 마트에서 파는 전자레인지용 팝콘.
데우면 뜨겁고 고소하다. 갈 일 있을 때마다 꼭 두 개씩은 사온다. 갈 일은 드문데 두 개밖에 안 사와서 아껴 먹어야 한다. 중요한 순간에만.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몇 알 더 집는다. 반복적으로 입에 욱여 넣으며 생각한다.
아깝다.
사라지는 팝콘이,
봄이,
서울이,
사라진 시간이, 사라지는 시간이 아깝다.
언젠가 다시 날이 식을 것이다. 봄도 곧 끝날 것이다. 금요일 새벽은 수능 2주 전과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는 건 정말 큰일났다는 뜻이다. 버겁다는 기분. 왜 새벽까지 이러고 있나. 이번주도 나는 봄도 저버리고 책상에 앉아 있었건만 왜 이시간까지 아직까지. 이대로라면 내일도 나는 실패하겠지. 좌절을 맛보겠지. 그러지 않기 위해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동안 나는 뭐했나?
금요일을 잘(의외로 너무 잘) 넘기고 토요일. 약속에 가려고 6시쯤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황홀할 지경이었다. 반짝거리는 도로와 흩날리는 나뭇잎, 초록불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건너는 사람들. 한 편의 영화. 노을빛 세례. 매일 보는 노량진 수산시장 앞 횡단보도가 천국 같았다. 와인을 마시러 간 곳은 넓은 공간에서 캐주얼하게 마실 수 있었다. 와인을 이렇게 다룰 수도 있구나. 난 왜 이제 알았을까. 서울에 이런 곳이 더 많을 텐데. 아까워, 아까워…

오늘만큼은 일찍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밖에는 어제처럼 봄과 서울이 있었다. 그 사이에 내가 있어야 했다. 밀린 집안일과 더 밀린 마감을 빠르게 끝내고 오늘은 3시에는 꼭 나가기로. 어딜 가지. 일단 할 일이 있으니 카페를 가야 하나. 나는 햇살과 바람을 맞고 싶은데. 그럼 돗자리를 챙기고 반포를 가자. 누워서 노트북으로 할 일을 하자. 근데 과연 집중이 될까? 이거 오늘까지는 무조건 해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가지 못했다.
돗자리까지 등에 둘러맸는데.
나는 또 실패했다. 봄을 외면했다. 대신 창문을 활짝 열고 봄기운을 느끼다가, 나도 정말 그 일부분이라고 속으로 외치다가 잠을 잤다. 바깥 공기랑 안 공기랑 비슷하면 내 방도 봄 아닌가? 내 방 창문은 아주 크니까. 벽의 절반은 족히 되니까. 일어나니 온통 깜깜했다. 기분이 바닥에 눌어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팝콘을 돌렸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안될 것 같았다. 요즘 봄내음을 맡으면 가끔 울 것 같다. 여름이 오면 정말 울기만 하다가 날이 식어버릴 것만 같다.

세상 모든 게 싱숭생숭하다. 마음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무슨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느리게, 느리게 살고 싶을 뿐인데. 그냥 계절 좀 느끼고 세상을 탐미하며 ‘살아있음’을 인지한 채 선명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그럴 수가 없다. 빠르게 끝내야 하지만 또 잘하고도 싶다. 봄도 즐기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다. 술도 마시고 싶고, 정말 마음이 동해서 글도 쓰고 싶다. 아깝다. 자꾸 아깝다.
바쁠 때 나는 내가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일정과 할 일로 가득 차서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을 보지 못하고 내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다. 아깝지 않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어떤 건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지금도 블로그를 쓰는 대신 오늘 잠을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조급한 걸지도. 차분히 차분히. 이제 중간도 끝났고 시간도 많아졌으니 조금 낫겠지.
여전히 사는 일에 서투르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면서도 다시 낙관하고 포기하지 않는 일에 능숙하고 싶다. 아직은 무얼 포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내 삶이 진짜 나는 아닌 것 같다. 실체도 없는 ‘하고 싶은 일’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러면서도 현실은 몽상을 흐리고, 지금조차 소소한 좌절이 이어져 나를 일으켜 세우기에 급급하다. 다만 좋은 일이겠지. 좌절하지만 더 잘하고도 싶으니. 동력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실패라는 성취를 야금야금 적립하며 나아가고 있다. 잘하면서 몽상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다시, 부지런해야겠지.

지금 나에게 과분한 계절.
어둑해질 무렵 집에 돌아오면 행복한 아쉬움이 차오른다.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다 나도 모르게 산책을 하게 된다. 꽃이 피어있네. 가볼까. 바람이 불어오네. 조금만 더 더. 봄기운에 순순히 홀려주다 낯선 골목에 닿는다. 봄은 더 멀리 가게 하고 세상의 반경을 넓혀준다.
그런 의미에서 봄은 으스대지 않는 계절. 그 자체로 빛나면서도 다른 활동에 제약을 주지 않는다. 삶을 응원하는 계절. 밤새 테라스에 앉아있을 수 있고, 창문을 열어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봄은 충분할지도 모른다. 굳이 나서서 벚꽃놀이를 가지 않아도, 한강에서 피크닉 하지 않아도 괜찮다. 계절은 하나의 이벤트라기보단 닫힌 창문을 열게 하는 것. 지나치던 벤치에 잠시 머무르게 하는 것. 그 작은 변화를 눈치채고 감응하는 것만으로도.
그렇지만 봄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봄은 매년 오지만 지금은 지금뿐이니.
좋은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