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나의 방, 내 시간의 나이테

켜켜이 쌓인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글 입력 2024.03.2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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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에 고작 몇 년밖에 더하지 않은 짧은 삶 속에서도 확신할 수 있는 몇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독립된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와, 평생을 함께한 가족과 같이 살더라도 각자만의 방이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서울에서 저만의 방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전까지는 모든 방을 언니와 함께 쓰거나 기숙사 친구들과 한방을 나누어 썼어야 했거든요. 막상 그렇게 살 때는 크게 불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방이 생기고 나니 그간 내가 얼마나 숨 막혔는지가 뒤늦게 파도처럼 다가와 당황했었습니다.

 

한 사람의 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고들 합니다.

 

제 방은 어지럽습니다. 수납공간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은 것들이 시야 안에 노출되어 있죠. 방 청소 소동을 벌이고 난 다음, 한 하루 정도는 깔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며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중얼거립니다. 가끔 제 물건을 찾지 못해 수 분을 방황하기도 해요.

 

그래도 저는 난장판인 제 방이 내심 좋습니다. 온갖 것들을 벌려두고선 허덕이면서 수습하고, 그러면서도 어찌저찌 삶을 헤쳐 나가고 있는 저를 보는 것 같아요. 공감하셨을까요? 그렇다면 제 방과 여러분의 방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의 제 방은 이렇습니다.

 

책상 위는 다녀온 전시의 작은 책자, 길을 가다 받은 전단, 며칠 전 보았던 영화의 포스터,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읽다 만 책으로 덮여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장은 간간이 모아온 DVD들과 앨범들, 지난 학기의 교재들과 생필품으로 가득 차 남는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작은 행거에는 빈틈없이 옷이 걸려있고, 알뜰한 공간 활용을 위한 행거 밑 옷 상자에는 아직 입을 철이 오지 않은 옷들이 들어있습니다. 상자 위에는 책가방과 어깨가방을 놓았었죠.

 

행거의 옆에는 작은 5단 서랍이 있어요. 나름대로 용도를 나누어 옷을 잘 개켜두었답니다.

 

침대 위에는 다정한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인형과 늘 함께하는 경추베개, 그리고 정말 어렸을 때부터 저와 함께한 애착 인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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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사진은 제 방이 아닙니다.

 

 

지금 지내고 있는 뉴질랜드의 제 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위로 시선을 옮기면, 정리되지 않는 전선과 반쯤 열린 화장품 파우치, 터지기 직전인 필통과 책꽂이, 아직 가계부로 옮기지 않은 영수증이 보입니다. 아이패드와 과제용 도서를 책꽂이 옆에 세워두었고, 그 옆으로는 휴대용 칫솔 함과 캡모자가 보입니다. 물티슈와 기초화장품을 담은 정리함, 옆에는 거의 다 쓴 선 스틱이 서 있습니다. 분명 반절이 넘게 남은 상태로 가져왔는데, 왜 이렇게 빨리 달아버리는 걸까요. 뉴질랜드의 햇볕 때문일 겁니다.

 

몸을 돌리면 보이는 게시판에는 학교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와 포도알 스티커 판, 일전의 광주극장에 갔다가 받아온 스티커, 도서 대출 영수증이 꽂혀 있습니다. 창문 바로 옆, 벽 한쪽에는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던 날 그린 뉴질랜드의 풍경을 붙여두었습니다. 거의 매일 틀고 있는 히터와 얼마 전에 생긴 커다란 거울도 벽을 장식하는 멋진 물건들입니다. 뉴질랜드까지 함께한 경추베개와 기숙사에서 받은 털 담요가 썩 깔끔하지 못한 형태로 침대 위에 누워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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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도 제 방이 아닙니다.

 

 

제가 보이시나요?

 

방을 그리듯 묘사하다 보니, 제 눈에는 오늘 아침의 제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반쪽짜리 커튼을 열고, 히터를 끈 다음 의자 위에 걸쳐둔 실내복에 머리를 넣고 있는 제가 보입니다. 오늘따라 머리가 잘 들어가지 않아 고생했었죠.

 

서울에서의 제 아침도 선명히 보입니다. 옷 상자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잡아 알람을 끄고 그대로 엎드린 채 몸부림치고, 급하게 준비하느라 놓고 갈 뻔한 지갑을 잡아채 뛰쳐나가곤 했던 몇 개월 전의 제가 보여요.

 

방은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 나만의 나이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낸 시간이 물건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여 지금의 모습을 만드니까요. 이사를 할 때마다 들어 옮길 수 없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이사를 하게 된다면 정말 그리울 거예요. 뉴질랜드에 머무는 기간이 4개월밖에 되지 않아 매일매일 그리움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제 서울 방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날도 오겠죠? 세상에, 얼마나 허전할까요? 아직 그것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질문에 답해보고자 '방'에서부터 글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제 방의 이곳저곳이 저를 잘 설명했을까요? 자기소개보단 나를 만든 기억들만 열심히 돌아본 것 같아 기분이 묘합니다. 이 글은 자기소개라기보단 그 이전의 자아 성찰에 가까운 것 같아요. 물 흐르듯 명쾌하고 거미줄처럼 짜임새 있는 자기소개가 넘치는 시대, 나를 돋보일 글이 아닌 ‘내 방 탐구’ 같은 글을 쓰는 것도 즐겁네요. 글쓰기의 새로운 재미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여러분의 방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 나의 방을 가끔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컬쳐리스트] 박주은.jpg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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