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엄마, 나 죽고 싶어, 연극 "비 Bea"

우리는 모두 조금씩 마음 맹인이다
글 입력 2024.02.2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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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 Bea"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야흐로 비염의 시기다.

 

코가 간질거리며 재채기가 나올 듯 안 나오는 것도 성가신데 시도때도 없이 줄줄 흐르는 콧물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다. 이유라도 알면 좋겠다. 꽃가루가 있는 밖에 나간 것도 아니고 깔끔하게 청소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

 

이럴 때면 내 몸이 얼마나 내 것이 아닌지 알게 된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대화로 해결법이라도 찾고 싶은데 코와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답답함에 몸부림치다가 문득 비를 떠올린다. 코 하나 삐뚤어져도 미치겠는데 비는 얼마나 갑갑할지를 생각해본다.

 

 

Bea_poster_a.jpg


 

비, Bea, 비아트리스는 본명보다 애칭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한다. 벌(Bee)과 같은 음성을 지닌 덕분에 엄마는 그를 붕붕이라고 부른다.

 

비는 정확한 원인도 모른 채 만성 체력 저하증으로 8년째 침대에 누워 생활한다. 무대는 그런 비의 방 안이다. 중간에 큰 침대가 있고 옆에 탁자와 조명, 멀리 테이블이 있다. 무대가 전환되는 일이 없지만 빛을 통해 장면을 변환시킨다. 무대는 두 상황으로 나뉜다. 비의 내면과 비의 현실.

 

내면 속 비는 무척이나 활달하다. 계속해서 침대 위를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거나 큰소리로 웃는다. 레이의 말에 따라 자세를 바꾸고 경청한다. 침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지만.

 

현실 속 비는 몸을 혼자서는 거의 가누지 못한다. 음식도 맛이 느낄 수 없다. 흥분과 자극을 찾지만 성행위에서도 아무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종일 활발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비를 보다가 입술을 이용해 겨우 말을 뱉는 비를 보게 되면 그가 얼마나 외향적인 사람이었는지, 지금 얼마나 답답할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고작 코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답답해 죽겠는 게 사람인데 비는 오죽할까.

 

비를 향한 묘사를 살펴보면 내향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어릴 땐 사과나무에 올라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바람에 엄마 캐서린을 심장 졸이게 만들고 집엔 춤 출 때 입을 옷이 한 가득이다. 또, 연극을 좋아해서 자주 보러 다녔다는 비에게 이 침대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은 그야말로 감옥이다.

 

8년.

 

비는 8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음식, 똑같은 풍경, 똑같은 고통. 그는 8년 동안 엄마가 모든 것을 주었고 비 자신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사실에 무척 감사해하고 있고, 또 엄마를 굉장히 사랑하지만 이제 죽고 싶다고. 때론 죽음보다 끔찍한 게 있다고. 

 

연극은 그렇게 비의 삶을 그려나간다.

 

 

Bea_poster_b.jpg


 

딸과 엄마의 관계. 참 미묘하다. 챙겨주고, 챙김 받고, 잔소리하고, 짜증내고, 곁에 있고, 울고, 웃고, 화내고, 싸우고. 모든 인간 관계가 그렇지만 모녀 관계는 좀 더 많은 형태로 다가오고 많은 감각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연극 “비 BEA”의 등장인물 관계가 모녀인 순간 많은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엄마, 나 죽고 싶어. 엄마가 이 이야기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일 거 알아. 그럼에도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엄마가 내 죽음을 도와줄 유일한 사람이니까.

 

비는 오래 생각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그 순간 비가 그동안 느꼈을 고통과 미안함이 단번에 느껴진다.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쉽게 담지 못한다. 그럼에도 죽음을 도와달라고 청해야 한다는 것, 그만큼 괴롭다는 것, 비의 대사에는 이 모든 게 느껴진다.

 

그런 비의 편지와 요구에 캐서린은 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릴 적 사과나무에 올라간 비를 보고 내려오라고 호통을 쳐도 울어도 꿈쩍하지 않아 그저 아이를 따라 웃었던 그때처럼, 캐서린은 비를 이길 수 없다.

 

부모를 잃은 아이를 뜻하는 단어는 있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를 뜻하는 단어는 없다. 그만큼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며 울면서도 비를 이해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그처럼 입술만 움직이며 남의 도움에 기대어본다.

 

둘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죽고 싶다고 선언하는 비는 잔인해 보일 수 있지만 엄마의 잃어버린 ‘8년’에 대한 죄책감이 그 말 속에 숨어있고 비의 의견을 수락하지 않는 엄마는 비의 고통을 모르는 듯 보이지만 비의 잃어버린 ‘8년’을 비보다 더 슬프게 여긴다. 그러다 둘은 말한다. 나는 그 8년동안 우리가 함께여서 좋았다고. 결코 잃어버린 적 없다고.

 

 

24 비Bea_레이_강기둥.JPG

 

 

극에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레이먼드. 편하게 레이라 부르는 이 사내는 어릴 적부터 큰누나를 돌보아왔고 그래서 누군가를 돌보는 건 좋은 일이라 이 일을 택하게 되었다 말한다.

레이는 훌륭한 도우미이자 모녀의 우편배달부이고 비에게 생긴 친구이며 죽는 방법을 알려주는, 말하자면 비공식적 의사다.

 

레이는 모두가 조금씩은 마음 맹인이라 말한다. 내가 본 것을 상대도 봤다고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도 똑같이 생각할 거라고 믿는다고. 그러나 실제로 상대와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상대를 나처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오는 불안감, 실수를 견디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비와 레이, 비와 엄마인 캐서린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연결된다.

 

비는 무언가 강렬한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 레이에게 마스터베이션을 부탁한다. 레이는 이를 거절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존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너를 존중하듯이 네가 나도 존중해야 한다고. 결국 비가 자극을 느끼도록 도와준 뒤에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이 일은 내 업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그것만은 꼭 알아주셨으면 한다고.

 

어쩌면 비가 캐서린에게 부탁한 것도 존중 없는 요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도와줄 수밖에 없지만, 그 일은 엄마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레이와 캐서린이 비를 도울 수밖에 없는 것은 둘이 어느 정도는 마음 맹인이어도 어느 정도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나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기 때문에. 비와 나를 다른 자아로 격리해 볼 수 있을 만큼 비를 사랑하기 때문에.

 

 

24 비Bea_캐서린_강명주.JPG

 

 

존엄사를 이야기하는 이 극은 빛을 통해 두 가지 화면으로 변환해 보여주는 만큼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보여준다. 존엄사를 원하는 사람의 입장도, 그 사람의 주변 사람 입장도.

 

우리는 쉽사리 존엄사 문제를 토론에 올렸다. 환자의 입장과 존엄권 존중, 악용될 가능성. 찬반의 이유를 열띄게 설명하며 거리를 두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나의 문제라면, 내 가족의 문제라면 우리는 쉽게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동안 살아있던 이유는 단지 엄마를 생각하면 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비의 마음도 아이가 죽어갈 때마다 잘하고 있어, 할 수 있어, 응원하는 캐서린의 마음도 알지 못한다.

 

내가 비라면, 내가 캐서린이라면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때론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도 있는 법인데. 그러나 아이 잃은 부모를 칭하는 단어는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인데. 

 

알 수 없다. 다만 극의 마지막, 드디어 자유를 얻어 신나게 웃으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비와 침대에 갇힌 듯 움직이지 못한 채 오열하는 캐서린의 목소리가 섞이던 그 장면이 오래, 아주 오래 떠오를 것 같다.

 

 

 

전문 김혜원.jpg

 

 

[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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