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선이 오래 머문 문장들

당신의 문장은 무엇인가요?
글 입력 2024.05.0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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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싶다면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의식적으로 하는 생각이다. 마음은 몸을 따르듯 몸도 마음을 따르니. 그렇다면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서 나올까? 여러모로 복합적인 질문이지만, 혼자 힘으로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럴 때 종종 나는 기대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문장’이다.


문장은 책에도, 음악에도, 영화에도 있다. 나의 동공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멈춘다. 근래 나의 시선이 오래 머문 문장들을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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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거나 잊어가거나 사랑하거나 슬퍼하거나

잊어가거나 잊혀가거나 사랑해야지 슬퍼하지마

 

 

밴드 ‘혁오(Hyukoh)’의 음악 ‘Silverhair Express’의 가사 전문이다. 2020년에 정규 2집 ‘사랑으로’를 발매한 혁오는 걸작을 내놓고 지금껏 무책임하게 종적을 감추고 있다. 이런 앨범을 다시 가져올 거란 기대감만 잔뜩 부풀린 채. 두 번째 트랙인 ‘Silverhair Express’의 가사는 인생을 말하고 있다. 저 8마디가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알아가고 사랑하고, 잊어가고 슬퍼하는,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이 사실 전부일지도 모른다. 결국 필연적으로 잊어가거나 잊혀가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혁오는 낙관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어떤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다시 사랑해야 한다고.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고. 그 이유를 되묻기보다 담담히 순응하게 되는 8마디의 강렬한 서사. 나는 슬플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가장 단단하게 위로받는다. 눈을 감고 가만히 듣다가 눈을 뜬 나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사랑으로’의 마지막 트랙인 ‘New Born’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까지 함께한다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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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낙관을 잃지 않는 태도는 다음 문장으로 연결된다. 정지돈 소설가의 2021년 산문집인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서는 이런 단락이 나온다.


  
여담이지만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 감각 같은 실질적인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 먹은 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 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자기 확신은 완벽한 픽션인데, 사실 인간은 픽션적 존재고 세계(역사)는 픽션의 실현과 재현의 교차로 이루어지므로 픽션에 대한 확신이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원동력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잊거나 잊히더라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살면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믿음. 정지돈 소설가는 착각의 힘을 이야기한다.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으로 작가가 될 수 있듯이, 우리도 우리가 믿는 대로 살다 보면 정말 세상이 그렇게 된다. 세상에는 정해진 규칙이나 매뉴얼이 없다. 그냥 우리의 착각이 곧 지구의 유일한 규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엉망이라고 말하는 문장이 일시적으로 나를 해방시킨다. 지금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지금은 나의 전부지만 당장 모든 걸 관두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지으며 살 수도 있다. 이게 더 잘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나의 환경과 믿음이 나를 구성하는 전부지만,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고 새로운 믿음을 시작하면 완전히 새로운 내가 펼쳐질 것이다.


그건 삶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어쩔 수 없음에 순응하면서도 믿음을 멈추지 않는 것. 믿는 일은 온전히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누구도 우리 대신 믿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싶은 건 무엇일까? 우리의 인생은 결국 이 대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그러니 조금 가벼워지자. 가끔은 살아있다는 게 신기하다. 성취를 위한 기계처럼 정신없이 작동하다가, 물밀듯 쏟아지는 인스타 피드를 흡수하다가, 문득 허공을 응시하니 방 안은 고요하다. 원래 세상은 고요하다는 깨달음. 손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손을 움직인다. 강물은 흐르고 나는 그걸 보고 있다. 나는 목적 없이 살아있고 세상은 이유 없이 존재한다는 깨달음. 머릿속 분주함이 쓸데없고 기괴하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매몰되면 안 된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 드넓은 초원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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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홍상수 감독의 서른 번째 영화 ‘우리의 하루’를 우연히 만났다. 한 젊은이가 늙은 시인에게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사는 동안 시선이 멈추는 문장들은 끝이 없다는 사실 덕분에 나는 계속 잘 살고 싶어진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 당신을 차지하고 있는 문장은 무엇인가.

 

 

“사는 건 뭡니까.”


“정답을 찾는 거잖아. 너가 말하는 건. 정답이 너무 많아. 책마다 있어. 그건 다 오답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어색하고 어설프고 어중간하잖아. 살아있으면 영원히 모르지. 미리 알 수 없고 영원히 알 수 없는 거지. 그래서 너무 좋잖아.”


“진리는 뭡니까.”


“같은 말 계속 하는구나. 오답이라니까. 진리란 오답들 사이에서 헤매는거야. 우린 찾을 능력이 안 돼. 작은 것에 감사하는 거야. 앞에 있는 걸 능력되는만큼 좋아하고 감사하고, 뜻을 찾지마. 그건 비겁함이야. 그냥 물로 뛰어들어. 다 알고 나서 들어가려하지 말고. 비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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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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