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는 송골송골한 땀이 앞머리를 처지게 하고, 등에는 자글자글한 땀이 결국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가장 크게 요동치는 내 속과 안간힘을 다해 차분한 척 내보이는 표정.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말수는 줄어들고 손을 가만있지 못해 믿을 구석이라곤 지금 해야할 일뿐이다. 굴욕이다. 굴욕에 처해있다. 스스로만 굴욕을 인지하는 상황일 때 의자에 가만히 앉아 굴욕 당하는 나를 오롯이 감내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깨벗는 편이 나을 것이다. 뭐 그쪽의 굴욕도 만만치 않겠지만.
웨인 케스텐바움은 저서 <굴욕>에서 크고 작은 굴욕들을 나열해 굴욕이 가지고 선사할 수 있는 의미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굴욕은 막아낼 수도 당해낼 수도 없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삶에 침투하지만 그런 굴욕의 필연성이 과연 어떤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 저자는 당황스러울만치 솔직하게 적어내린다.
이 에세이 집은 평범한 에세이와는 그 구조도 형식도 다르다. 책이 아닌 악곡 형식 중 하나인 ‘푸가’를 이용해서 단상을 이어가는데, 각 푸가 사이에는 달리 이어주는 말도 없을뿐더러 자연스러운 이음새를 위해 억지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런 병렬적 배치는 저자가 ‘굴욕’에 대해 써내려가고 싶은 마음과 써내려 가면서 ‘굴욕’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병치하는 듯 보인다.
“나는 굴욕에 지성적으로 접근해서 굴욕의 온도와 위상을 파악하고 싶어 하고 있다. 모든 주제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주제라고 해도, 지성적 로맨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서서히 접근한다면. 여의치 않을 때 물러난다면. 잠정적인 방식으로 재도전한다면.”
- <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44p
경험해온 굴욕과 목격해온 굴욕, 아직 일어나지 않은 굴욕을 상상하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굴욕이 텍스트로 쓰여져 있는 걸 본 순간 하나같이 식겁한 마음이 들었다. 꺼림칙한 공감이었다. 공감하고 있는 것조차 굴욕적이라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굴욕은 아주 내면적인 것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대중적인 것일 수도 있다. 누구도 굴욕을 자랑거리처럼 까발리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 내가 겪은 굴욕은 꽤 많은 타인이 경험해 본 굴욕일 수 있다.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공감이 되는 구절을 볼 때마다 약간의 죄책감과 약간의 안도감을 얻었다.
나는 굴욕을 잘 느끼는 편이다. 정확히는 머쓱함을 잘 느낀다. 머쓱함은 굴욕 이전의 단계라고 설정하곤 하는데, 선행으로 오는 머쓱함 덕분에 최악의 굴욕까지 가는 상황을 막기도 한다. 머쓱함까지는 파도타듯 즐길 수 있지만 파도를 잘못만났을 때는 굴욕까지도 상황이 심각해진다. 머쓱함에서 굴욕으로 넘어갈 때는 큰 특징이 발현한다. 우선 표정관리가 안된다. 리액션이 고장나다 못해 어떤 기능이 아예 손상되어서 말그대로 뚝딱거리게 된다. 뚝딱거림을 가장 진실하게 느끼고 있는 건 나 자신일테니 표정에서 몸 전체로 고장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실시간으로 굴욕을 느끼는 나를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이런 굴욕을 부정적 감정으로만 두지 않고 긍정적으로 승화하는 용어가 등장한다. “속뚫림”은 ‘우리가 굴욕을 겪어냄으로써 또는 굴욕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데 <옥스퍼드 미국 영어사전>에 따르면 억압된 감정이 있을 때, 그 감정을 야기한 경험을 반추하고 그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속뚫림 작용이라 한다. 이후에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글쓰기도 속뚫림 과정, 곧 굴욕감을 해소하기 위해 굴욕감을 재연하는 과정이다.”(15p)
글을 쓰는 사람은 굴욕에 더 예민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굴욕을 더 잘 느끼고 그래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굴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실된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 생각하여도 굴욕을 가까이 두기란 명랑하게 다가가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러니 굴욕과 친해져야 한다. 같이 상생해나가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굴욕이 찾아올 때마다 힘들긴 힘들어도 아주 쫓아내고 싶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과제는 전위와 초월의 경제를 통해 굴욕을 유용하고 기분 좋고 유익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내는 것일까? 우리의 과제가 그런 굴욕의 연금술일까?”
- <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23p
확실히 쉬운 상대는 아닐 것이다. 겪어도 겪어도 적응 되지 않을 것이다. 똑같이 이마와 등에서 땀이 흐르고 그 땀구멍을 조절하는건 굴욕을 손에 쥐는 것만큼 어려울테다. 다행스러운 건 푸가 11장에 첫 문장으로 나오듯 “굴욕은 아주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 굴욕을 보는 방식만 달리 한다면.
언젠가 한 가수가 인터뷰에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 고통 뒤에는 성장이 따라오니 그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고통을 즐기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다음에 올 고통이 어떤 성장을 이룩해낼지 기대되는 마음이 고통으로 버텨내야하는 힘겨운 시간을 이겨버린거다. 고통을 굴욕으로 바꾸면 어떨까. 굴욕이 낳는 게 결국 고통이라면 모두 한 범주로서 생각해볼 수 있다. 굴욕이 가져올 성장을 상상하는 것이 다가올 굴욕의 아픔을 상쇄시켜주진 않는다. 하지만 굴욕을 대하는 태도에 자신감을 심어줄 순 있다.
내 굴욕이 얼마나 읽힐지에 대해 한참을 궁금했던 적이 있다. 저자가 연속적으로 굴욕을 늘어놓는 것처럼, 그리고 거의 모든 굴욕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도 굴욕을 참 많이 의식하는 이라는 걸 알았다. 쌉싸름했다. 내 굴욕을 자주 느낀다는 건 남의 굴욕도 지레 예상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반대로 남의 굴욕을 잘 포착한다는 건 내 굴욕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굴욕을 느낄 때면 같이 따라오던 근거없는 정의감이 있다. 굴욕을 느끼는 사람들을 구원해주고 싶다는 효력모를 정의감. 내가 느낀 굴욕을 누군가 반복해서 겪지 않았으면 했다. 그게 곧 성장으로 귀결될 지라도 괴로운 건 분명하니까. 타인에게 굴욕적인 순간이 일어나기 직전을 목격할 때마다 나름의 행동을 취했었다. 굴욕을 굴욕으로 여기지 않고 별거 아니게 여겨줬다. 내가 굴욕을 느낄 때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별 거 아니야.”
언급하기 민망한 소재가 끊임없이 언급된다. 수치심이라곤 애진작 잊은 사람처럼. 하지만 저자는 단 한 순간도 수치심을 잃은 적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배변을 보는 다른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이겨내야만 한다.”(244p)라는 문장이 뒤따르는 것처럼 작가이자 관찰자로서 사명감도 투철하다. 가장 내밀한 부분을 세상에 당당하게 드러내놓기까지 그가 견디며 탐구해왔을 굴욕들에 유난스럽지 안은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