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의,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영화 [영화]

<바빌론>, 영화의 역사 속 모든 패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글 입력 2023.03.1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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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바빌론(Babylon)>은 ‘토키(talkie)’라고 불리는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무성영화가 점차 몰락해가던 격변의 시기, 1920년대의 할리우드를 그리고 있다. 영화인으로서의 성공이라는 같은 욕망에서 출발했으나 동시대의 할리우드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며 각자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잭과 넬리, 매니의 모습은 아마도 어느 순간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던 당대의 실제 영화인들의 삶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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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패러다임이 바뀌다


 

영화계 입성을 꿈꾸는 넬리와 매니가 광란의 파티 후에 마주하게 된 무성영화 촬영장의 모습은 혼돈 그 자체다. 드넓은 땅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영화 세트장에서 수십, 수백 편의 영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이곳은 마치 공장 같다. 고성이 난무하고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바쁘게 돌아가는 영화 공장의 정신없는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스타 배우인 잭이 촬영 대기실에서 마음껏 술을 마시는 동안 엑스트라 배우들은 임금을 받지 못해 촬영 보이콧을 한다. 카메라가 다 부서져 촬영이 중단되고, 심지어 촬영 중에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는 이 하나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곳은 영화가 목숨보다 중요한 1920년대의 할리우드다. 

   

유성영화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완전히 개방된 실외 공간에서 한꺼번에 뒤엉켜 촬영되던 영화들은 이제 실내 스튜디오라는 소음이 통제된 환경에서 따로따로 촬영된다. 물론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보다 음향 기사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거나 필름 소리 때문에 방음 부스에서 촬영하던 기사가 찜통더위에 질식사하는 등의 과도기적인 모습도 나타난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촬영 현장에는 서서히 질서와 체계가 세워지기 시작하고, 관객들의 기대와 영화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높아진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배우의 목소리와 발음이 영화의 평판과 성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기존의 쉽고 단순한 대사는 이제 유통기한이 끝났다. 연인을 향해 “사랑해(I love you)”라는 말만 연신 외쳐대는 유성영화 속 잭의 사랑 고백은 관객들의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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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성’에서 ‘유성’으로의 변화는 영화계에 거대한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누구든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면 기회를 얻지만, 적응하지 못하면 곧바로 도태되고 만다. 시대에 맞지 않으면 갖다 버리는, 냉정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생존 싸움이 벌어진다.

 

세 주인공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영화판 주변을 전전하던 매니는 일찍이 변화를 직감하고 유성영화 시대의 다양한 변화를 주도하는 제작자가 되어 성공 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무성영화 시대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넬리는 자신의 두 번째 연기 인생을 여는 데 실패하여 방황하고, 무성영화 시대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잭은 결국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받아들인 뒤 자살한다. 

 

 

 

지나간 시절의 낭만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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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넬리를 향한 매니의 변함없는 마음이다. 넬리는 항상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매니가 힘들게 만들어놓은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도박 빚으로 그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하지만, 매니는 여전히 이런 넬리를 사랑한다. 넬리의 빚을 대신 갚아주려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순간에도 그는 넬리와 함께 떠나려고 한다. 그동안 시대의 변화에 가장 영리하게 적응해왔던 매니가 배우로서의 수명을 다한 넬리와 함께 저물어가기를 택한다는 것이다. 

 

참다못해 터져 나오는 넬리를 향한 매니의 고백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Te amo, te amo, te amo)”는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유성영화 속 잭의 고백 장면처럼 웃음을 유발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바로 철 지난 무성영화의 문법이 어떤 미사여구의 도움도 없이 온전한 진심을 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이 대사는 매니와 넬리의 아름다운 키스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무성영화의 시대로 띄워 보내는 러브레터로 탈바꿈한다. 

 

무성영화의 촬영 현장은 도덕, 윤리, 질서라는 것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이었지만, 동시에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기적같이 눈부신 순간을 선사하기도 했다. 해가 지기 직전, 술에 취한 잭이 힘겹게 언덕을 올라 매니가 가져온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시작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무성영화 현장임에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가 감독이 ‘컷’을 외치는 소리에 다 함께 환호성을 지른다.

 

영화를 향한 그들의 간절함에 하늘이 응답하기라도 한 듯이, 잭이 사랑하는 여인과 키스를 나누는 모습은 그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노을과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영화의 한 장면을 완성해낸다. 이것은 파티장 직원이었던 매니가 동경했고 할리우드를 떠났던 1952년의 매니가 그리워하던 순간이자,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바빌론>을 통해 2023년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낭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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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넬리를 향한 매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더러운 가운데 순수하고, 차가우면서도 그 무엇보다 뜨거웠던 당시의 할리우드를 향한 그의 사랑과 맞닿아 있다. 도망치듯 뉴욕으로 떠났던 매니는 수십 년이 지나 다시 LA를 찾는다. 그동안 영화를 잊고 살았던 그는 한 극장에서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기를 다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 있던 자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이야기를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할리우드의 추잡한 밑바닥을 다 목격하고도 ‘Singing in the Rain’을 들으며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에 대한 자신의 꿈과 열정을 마주하는 매니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큰 울림을 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무성영화가 몰락하고 유성영화의 시대가 새롭게 열린 것처럼, 영화는 항상 경쟁에서 이긴 승자의 길을 따라가면서 지금의 단계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반대로 영화의 발전은 한때는 승자였던 무수한 패자들이 자신이 누리던 스포트라이트를 새로운 승자에게 내어준 역사이기도 하다. 영화는 언제나 패자의 세계를 밑거름 삼아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잭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의 모습은 영화 속에 남아 영원히 기억될 거라던 영화 평론가의 말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목적과 연결된다. 그는 격변기의 할리우드에서 잭과 같이 패자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던 지나간 시대와 사람들을 영화로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아니,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바빌론>이라는 영화 자체를 일종의 헌사로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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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몽타주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부터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 알프레드 히치콕과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지나 <터미네이터2>, <쥬라기공원>, <매트릭스> 그리고 <아바타>와 같은 오늘날의 영화로까지 이어지며 장대한 영화사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감독의 의도를 과할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이 장면은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순식간에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미언 셔젤은 몽타주라는 직설적인 고백법을 통해 전 세계의 관객들에게 영화를 향한 자신의 거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관객들은 이미 진심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문장이 “사랑해”라는 가장 쉽고 단순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니라는 인물과 영화 <바빌론>을 통해 오늘날의 영화를 있게 한 과거의 시간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 그의 노력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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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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