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켜버린 두 가족 사이에서 실존적 성장은 피어 오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리얼리즘적 파동(波動)
글 입력 2023.02.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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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가족의 불편한 조우(遭遇)

 

두 일본 부부가 있다. 우선 노노미야 부부로 아내 미도리(오노 마치코 연)와 남편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 연)는 최고급 맨션에 산다.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 료타 가족은 세평(世評)으로는 완벽한 중산층 가족이다. 료타의 발화(發話)에서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부분을 추단(推斷)할 수 있다. 하이 앵글(high angle) 시선에서 아내 미도리나 아들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 연)를 바라보는 통할(統轄)적 분위기가 간취(看取)된다.

 

료타는 주말에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인정받기 위해 회사일을 한다. 하지만 료타의 교육열은 남다르다. 케이타를 명문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려고 하고 피아노 교육을 일찍부터 시키다. 케이타는 아버지의 기대를 따르려 노력하지만 아망스러운 구석 없이 아폴로(Apollo)형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지녔다. 치열하게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자기 주장하기 보다는 순응하는 편이다. 피아노 연주회에서 무대 위 케이타의 보노라면 료타는 볼멘소리를 하게 된다. 케이타가 자신만큼 경쟁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채 순하기만 한 게 못마땅한 심상이다. 디오니소스(Dionysos)으로 성취지위(成就地位)에 집중하는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창졸간(倉卒間) 잘 나가는 건축회사 간부로 순탄한 인생만 남아있다고 생각한 료타에게 네메시스(Nemesis)는 휴브리스(hubris)를 쥐어준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6년간 키운 자신의 아들 케이타가 친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것이다. 영화 인서트(insert) 부분에서 아이가 “누구를 닮았나요?”라고 물어본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일찍이 전조(前兆)를 감득(感得)했을 것이다. 친아들 류세이는 사이키 부부(남편 유다이, 아내 유카)가 기르던 중이었다. 병원에 모인 노노미야 부부와 사이키 부부 중 기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편한 진실을 조우(遭遇)했을 뿐이다.

 

사건의 계제(階梯)는 법정 진술에서 풀린다. 간호사는 생래적(生來的)으로 신생아의 사회적, 물리적 배경에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며 사회적 박탈감을 느꼈다고 울먹인다. 자신은 소유하지 못하는 현실에 지청구해서 집안 배경과 소득격차가 나는 두 가족의 아이를 바꾼 것이다. 간호사가 삿된 범의(犯意)를 품은 것이 단순한 샤덴프로이테(Shadenfreude)로 보기엔 신(scene)의 비중이 꽤 길게 집중되어 있다. 간호사가 저저(這這)이 읊는 발단은 마르크스주의(Marxism)적인 의분(義憤)이 불뚝거린다.

 

간호사가 쏘아올린 거포(巨砲)로 두 가족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료타이와 유다이(릴리 프랭키 연)는 피(血)로 맺어진 아들(류세이)과 지금까지 기른 정(情)으로 맺어진 아들(케이타)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유다이 가족은 허름한 전파상가를 운영하는데 의식지우(衣食之憂)에 머무르는 형편 같다. 바른 자세를 하고 단정한 머리모양새를 한 료타와 편한 옷에 부스스한 머리스타일의 유다이는 캐릭터 코드(character code)가 각자 확실하다. 료타에게 유다이 가족은 이악스럽진 않지만 마치 보상금이란 몽리(蒙利)를 깐보는 가족인 것만 같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키웠지만 늘 자신의 기대에 조금씩 못 미쳤던 케이타와 사이키 부부에게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류세이(황 쇼겐 연) 사이에서 ‘자신의 아들은 이 아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료타에게 좋은 가족이란 자본주의 체제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의 기치(旗幟)는 물질만능주의적인 바로미터(barometer)다. 온정주의(溫情主義)로 이루어진 다소 시대착오적인 일변도(一邊倒)이다. ‘빈둥거리는 아버지상’인 유다이와 ‘자주 화내는 어머니’인 상대편 아내는 바쁘게 돈 버는 자신과 자신의 상냥한 부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두 가족이 부의(附議)할 때 료타는 경제력을 앞세워 두 아이 모두 거두고자 초든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신이 두 아이 모두 행복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라며 유다이에게 많은 돈을 줄 테니 두 아이 모두 달라고 경도(傾倒)한다. 아이를 어떻게 할지 재정(裁定)하는 모습도 가정 내에서처럼 독단적이다.

 

 

2. 간극(間隙)을 좁히기 어려운 두 부부

 

두 가족은 각자 친아들만 기르기로 하고 일정한 기간 서로 접촉하고 교류한다. 키즈카페에 가거나 상대가족의 집에 유숙(留宿)하기도 한다. 아이를 항구적(恒久的)으로 교환하기 전 두 가족은 계곡에서 다 같이 논다. 물놀이를 실컷한 두 가족은 가족사진도 찍는다. 아이 뒤에 우뚝 서서 찍는 료타와 다르게 유다이는 아이의 키높이에 맞춰 다리를 굽히고 아이를 뒤에서 한껏 안은 채 카메라를 응시한다.

 

두 가족의 다른 분위기는 다기(多岐)적으로 나타난다. 품위 있는 사업인과 순종적인 아내, 하층민 노동자와 주도적인 아내. 료타와 유다이를 계급적 관점에서 이렇게 나누어 본다면, 교육적 관점에서도 나누어 볼 수 있다. 안정적 환경을 제공하지만 친밀감이 떨어지는 료타의 집과 열악한 환경이지만 친밀감이 높이 유다이 집으로 말이다. 료타는 아이를 순치(馴致)하려 잡도리한다. 친아들 류세이가 집에 거주하자마자 집안 규칙을 종이에 목록으로 적어가며 설명한다. 6살 아이가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많다. 류세이는 료타의 집에서 웃물이다. 아이에게 있어 엄격한 규칙과 질서는 날로달로 가족이라는 이름 하의 질곡(桎梏)이다. 유다이 집에서처럼 중요 타자들과 복닥거리고 쾌활한 분위기 속에서 놀지 못하고 혼자 노는 것에 무료해 한다. 반면, 유다이의 친아들 케이타는 유다이 집을 점점 좋아하게 된다. 가난하지만 형제가 있고 아버지가 함께 놀아주기 때문이다. 유다이 역시 료타처럼 아이가 바뀐 것에 분노하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에는 행락(行樂)하는 것에 충실했다. 아이와 동화되어서 아이 눈높이에서 노는 것이 자연스럽다.

 

료타는 아이를 순치(馴致)하려 잡도리한다. 유다이와 료타가 아버지의 입장으로 대화하는 부분은 상위(相違)하는 둘의 견해를 더욱 발로(發露)한다. 영화의 주제이자 감독이 제시하는 아포리아(APORIA)이기도 하다.

 

유다이: 지난 반 년 동안만 봐도 케이타가 료타 씨보다 저랑 더 많이 있었어요.

료타: 시간만 중요한 건 아니죠.

유다이: 무슨 소리예요, 애들한텐 시간이에요.

료타: 저밖에 할 수 없는 업무들이 있어서요.

유다이: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하는 거잖아요.

 

류세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료타의 도화(圖畫)대로 준행(遵行)하지 않는다. 류세이는 료타에게 연신 “왜?”라며 반기를 든다. 료타는 상치(相馳)하는 류세이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류세이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료타도 새어머니를 거부했었다. 료타는 별안간 눈앞에 서 있는 어린시절의 자신(류세이)를 끌어안는다.

 

사실 료타가 류세이에게 수용적인 아버지이지 못한 연유(緣由)는 그의 역정(歷程)에 ‘아버지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다. 료타의 아버지는 료타에게 상처를 주던 대상이다. 도박과 주식에 빠져 엄마와 이혼하고 새엄마와 재혼했다. 료타가 생각한 이상적인 아버지는 어린시절 결핍을 전보(塡補)해주는 아버지다. 가족을 부양하는 막중한 책임감과 중압감을 해내는 것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라 믿었다.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료타는 아들 류세이에 관한 고민으로 모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영향권에 있다. 혈육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아버지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며 콤플렉스에 지배당한다.

 

영화는 전개 과정에서 여러 양상의 갈등을 풀어 놓는다. 아버지끼리(료타와 유다이)의 갈등, 부자 간(료타와 류세이) 파고(波高), 부부 사이(료타와 미도리, 유다와 유카)에도 알력(軋轢)이 있다. 노노미야 부부네는 2세대에 걸쳐 이원화된 입장이 같다. 료타의 아버지가 혈육을 제안할 때 료타의 새엄마는 ‘시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비롯한 물리적 근원을 긴요(緊要)하게 취급한다. 료타 역시 혈육을 선택하는데 아내 미도리는 감정적인 시간에 비중을 둔다. 사이키 부부 역시 남녀 부모 입장이 다를 게 없다. 남편과 대조적으로 엄마들은 페이소스(pathos)에 입각한다. 미도리가 완벽한 모성에 강박이 있어 케이타가 친자인줄 몰랐던 것을 모성이 부족했다고 자책하거나 유카가 낯설어하는 케이타를 꼭 안아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 변화하는 가족, 아버지 료타

 

영화 절정기 이후 료타는 ‘변화하는 캐럭터’로 거듭난다. 회사에서 좌천(左遷)되고 류세이와 불화가 생기면서 료타는 성찰적 심연에 빠진다. 그러다 옆에 있던 카메라를 확인하던 중에 케이타가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온통 피곤해서 자고 있는, 뒷모습으로 돌아누워 선 자기 자신이다.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며 료타는 소리 없이 흐느낀다. 케이타는 놀아주지도, 대꾸해주지도 않는 료타의 주위를 멤돌며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매정하게 유다이 집에 케이타를 보낸 유타와 료타를 조건 없이 사랑한 케이타 사이 대조법이 엿보인다. 료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정념(情念)의 메타포(metaphor)다. 그가 믿어온 이상적 아버지 상(像)은 허상(虛像)이었음을 통렬(痛烈)히 깨닫는다. 여기서부터가 변화하는 료타를 보는 분기점(分岐點)이다. 료타는 아이와의 소통, 친구같은 아빠를 가족의 정향(定向)으로 삼았다. 료타의 역동적 모티브가 커졌고 생기가 생겼다. 류세이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캠핑 장비를 사고 장난감총을 알아본다. 닮음과 다름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료타집이 등장하던 도입부에 미도리의 진공청소기 소리는 외재음(non-digetic sound)로 소음차단용이었다. 진공청소기 소리도 료타의 심적 변화와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어 한껏 커졌다. 얌전한 엄마였던 미도리가 진공청소기 흡입구로 류세이와 적극적으로 장난치며 논다. 적막했던 집안에 아이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방안 텐트 조명을 머리맡에 두고서 료타와 류세이는 나란히 천장을 본다. 이쯤이면 류세이의 마음이 가까스로 열렸는가 싶지만, 류세이에게 진정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슨 소원을 빌었냐는 료타에게 류세이는 원래 집(유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대답한다.

 

결국 류세이는 키워준 부모를 만나려고 가출한다. 류세이가 유다이 집에 가서 이층침대 아래 어스름한 구석으로 몸을 숨기는 것은 어두워진 류세이를 서레이드 코드(Charade code)로 대체한 것이다. 료타는 가출한 류세이에게 화를 내거나 혼내는 대신 “나도 가출한 적이 있어.”라며 달래준다.

 

류세이를 데려다 주러 간 유다이 집에서 료타는 케이타를 발견한다. 케이타는 료타를 보자 도망친다. 친아들이 아니라고 케이타에게 차가웠던 료타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이 집 근처 길에서 료타는 케이타를 따라간다. 진심으로 사과를 시도하기 위해서다. 영화 초반의 하이 앵글과 달리 이번엔 케타이가 로우 앵글(low angle)로 잡힌다. 료타가 하위에서, 케타이가 상위에서 초반 역학관계를 전복(顚覆)시켰다. 료타가 케타이 뒤를 따라가는 롱테이크 샷(long-take shot)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한껏 고취시키며 관객의 긴장감도 증폭시킨다. 료타는 담담하게 케타이에게 고백한다. “나도 피아노를 치다가 그만 뒀었어.” 3대에 걸쳤던 피아노 교습과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정서적으로나 스토리상으로 미장셴(mise-en-scène)적 식역(識閾)을 건드린다.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6년간은 아빠였다.”는 파롤(Parol)은 케이타를 공명(共鳴)하며 되려 과거의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용서하는 것만 같다. 료타의 마음눈이 커진 것이다. 또한 아버지로서 바라보는 세상눈이 커진 것이다. 료타에게 이 순간은 골자(骨子)를 이루는 파지(把持)이다.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려던 바람을 이룸과 동시에 어린자아의 상처에서 벗어난다.

 

마스터 쇼트(master shot) 장면은 마치 료타가 기투(企投)하는 과정과도 같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다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말처럼, 개별자(個別者)로서 아버지의 영향권을 벗어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본인의 본질(essence)를 찾은 것과 다름 없다. 감정 교류를 못하는 료타의 밑절미는 작파(作破)되었다.

 

 

4. 아버지가 된다는 것

 

이스라엘에서는 ‘아이 하나를 기르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아이를 기르는 순간 남성은 남녀서사, 부부서사에서 더 나아가 부모서사에 진입한다. 종래(從來)에 짊어지던 책임과 의무, 마음의 무게와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사실은 인간 서사에 있어 인격 도야(陶冶)의 결정체이다. 부모가 자각하지 못한 채 상처를 고스란히 대물림하는 일이 없도록 약자인 아이를 돌보고 살펴야 한다.

 

역설적(paradox)이게도 이 두 가족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계도(啓導)하는 연원(淵源)은 아이들이다. 보호하고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결국 부모를 일깨우는 존재인 것이다.

 

료타가 아버지 입장으로 아이에게서 얻은 편력(遍歷)은 한층 높은 단계의 아버지로 나아갈 발판이 되었다. 사변적(思辨的)인 아버지가 될 변화가 생긴 것이다. 아직 아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조금은 투박하지만 보결(補缺)하려는 료타 의지가 영화 후반부에 강하게 비춰진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이의 탄생과 더불어 저절로 얻게 되는 귀속지위(歸屬地位)가 아니라 실존적인 자각과 노력에 의해 비로소 유지되는 위치이다. 료타는 더 이상 자녀를 ‘조건’이 아닌 ‘존재’로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다. 아내와 유다이 부부, 아이들과 갈등과 화해를 겪으면서 료타는 결국 ‘자신이 아버지다’라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임을 깨닫는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가족이라는 것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임을 두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료타가 사과하고 케이타와 화해하는 과정은 두 갈래 길을 걸어가다가 다시 한 갈래길로 만나는 스크린 이미지와 조응(照應)한다. 기까지의 장면은 섬세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와 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어우러진 명장면이다. 두갈래 길이 끝나고 영화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료타는 케이타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몸을 굽혀 두 팔을 벌려 안는다.

 

둘은 나란히 유다이네 집으로 향한다. 이들을 맞는 유다이네 표정은 해낙낙하다. 두 가족 부자(父子)는 어둑발로 명멸(明滅)한다. ‘(해질 녘 두 가족은 실루엣이 되어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부모인지 알 수 없었다)’는 시나리오본처럼 화면에서 두 가족 부자는 아롱거린다. 마치 영화 속 골든베르크 변주곡같다. 일정 법칙을 취하다 마지막에는 새로운 대위법으로 연주되듯 각자 저마다의 노선을 펼치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나아간다. 결말로 갈수록 료타의 성인자아와 유년자아와의 대치도 달라진 듯하다. 료타 가치관과 이데올로기(ideology)가 탈구조주의적(post-structuralism)인 입장에 섰다.

 

엔딩(ending)에서 케이타와 류세이가 각각 어느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모호한 결말은 영화의 예술성과 미적 장치를 차용(借用)한다. 어쩌면 이들 가족은 연속적으로 교류하며 양쪽 아버지 사이의 울력과 가족 간 연대로 공진화(共進化)하는 길벗이 될 것이다. 병원의 실수가 이들에게 상보적(相補的) 발전을 꾀할만한 기회를 수여한 셈이다. 료타는 원래 지녔던 지적 능력에 더해 공감력을 기를 수 있었고 유다이는 공감력이라는 바탕에 성취 지향적인 아이를 대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사랑으로 두 아버지는 변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사랑하면 저절로 발전하는 듯이.

 

“6살 난 아이가 등원 길에 자랑을 해. 작년에는 숫자 8을 쓸 때 동그라미 2개를 그렸었는데, 지금은 이어서 그릴 수 있다고 말이야. ‘와, 발전했네!’라고 칭찬해주니 ‘엄마, 그럼 우리도 가훈을 하루하루 발전하기라고 해요. 매일매일 사랑하기 말고’라며 졸라. 가훈을 적어오라는 어린이집 숙제에 급해 매일매일 사랑하기라고 보냈었는데, 발전했다는 칭찬에 신이 나서 다른 친구네 가훈을 떠올렸던 모양이야.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어. ‘매일 사랑하면 저절로 발전할 수 있어’라고.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인데 제법 근사했던 것 같아.”

 

 

5. 아버지를 다룬 영화와 다른 가족 영화들

 

결혼한 남자는 아내 사이에 낳은 아이에게 ‘아버지’로 불린다. 이혼해도 여전히 ‘아버지’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입양아에게도 ‘아버지’다. 자녀를 가지기만 하면 ‘아버지’라는 수권(授權)이 자동적으로 생긴다. 료타와 유다이 두 사람은 우리 사회에 편재(遍在)하는 아버지이다.

 

영화 초반 료타는 다분히 전통적인 아버지상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될 운명에 놓인 엘리트 남성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진정한 양육자로 거듭나는 ‘아버지의 성장기’이다. 120분 정도의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관객 중 가족과 가정, 아버지에 관해 영득(領得)하지 못하는 이가 대다수일 수 있다. 그렇기에 감독 또한 가분히 정형화된 아버지상을 내어놓지 않았다. 자전적(自傳的) 요소를 삽입했을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생득적(生得的) 혈연관계가 가족의 전부가 아니란걸 어렴풋이나마 느꼈을 것이다.

 

부모와 가족에 관한 적부(適否)는 판단하기 어렵다. 가정을 유지하고 꾸릴 때 합목적성(合目的性)은 한가지 만일 수 없다. 각 가정의 사정, 주어진 여건 등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아버지였는가’라는 물음은 아버지 당신만의 일이 아니다. 성부(成否)는 아이와 아내, 이외 연관된 이들과의 관계로 이어진 유기적 과제이다. 이 모든 개관(槪觀)이 영화에서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장면 없이 안연(晏然)하게 그려진다. 세계적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극찬한 이유를 알 법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츠(これえだひろか)는 가족 영화로 필모그래피를 탄탄히 쌓은 영화계의 총아(寵兒)이다. 전작과 후작 전모(全貌)도 ‘가족’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전작으로 이미 <아무도 모른다>(2005)에선 ‘버려진 가족’, <걸어도 걸어도>(2009)에선 ‘죽은 가족’,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선 ‘갈라진 가족’ 등이 등장한다.

 

각기 다른 이야기지만 감독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미적원리로 ‘재현(poesis)’한다. 어느새 가족의 양태(樣態)를 끊임 없이 탐구한 감독으로 유명해졌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현대 사회에서 개전(改悛)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사실주의적으로 다룬 2013년도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감독의 2018년 작 <어느 가족>은 일견(一見) 제목부터 ‘가족’이란 재료가 활용되었다. <어느 가족> 또한 예술영화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보다 더 미학적이어서 평론계에서는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칭해진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을 살펴보면 감독이 본인만의 색을 노정(露呈)하는 몇가지 포인트가 있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을 톺아보자면,

 

첫째, 두 영화 모두 혈연관계가 아닌 가족관계를 짚는다. 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가족공동체는 아이러니(irony)하다. <어느 가족>에서는 가족 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진정한 가족이 된 듯한 플롯(plot)이 있다. 등장인물은 돈 문제에 송연(悚然)해질 정도로 서늘한 사이다. 미성년자 아이도 워크쉐어(도둑질)를 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1차 집단으로 따뜻한 부분이 공존한다.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데드컷(dead cut)으로 관객의 거리두기를 의도적으로 실시한다. 몰입을 방해해서 소외효과(alienation)을 더하는 것이다. ‘감정의 오류’가 개입되지 않도록 <어느 가족>에서도 형식적인 요소가 돋보이는데 영화 내내 ‘아이의 시선’으로 ‘낯설게 보기’를 온존(溫存)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마지막에 롱테이크샷(long-take shot)과 <어느 가족>의 양아들 죠 카이리(마츠오카 마유 연)가 버스를 타고 새로운 보호처로 이동하는 롱테이크샷이 오버랩(overlap)된다. 어른보다 키가 더 작은 아이가 버스 좌석에 앉아서 어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자리한 채 출발하는 버스로 인해 점점 앞서간다. 어른(오사무 시바타)은 멀어져가는 죠 카이리를 쫓아간다.

 

감독이 영화에서 자주 변통(變通)하는 도구는 ‘대조법’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조건 없이 사랑한 아이(케이타)와 조건적으로 아이를 사랑한 어른(료타)를 대조했다. <어느 가족>에서는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 연)에게 도둑질 시키는데 죄책감을 느끼는 오빠 죠 카이리와 죄책감 없는 보호자 오사무 시바타(릴리 프랭키 연)가 있다. 아이와 어른의 대조적 모습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료타의 개인적 인간 성장이 있었다면, <어느 가족>에서는 소녀 유리가 유괴된 동안 다른 가족공동체를 겪으면서 내면 성장을 한다. 무엇보다, 두 영화는 모두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는데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사람을 판가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감독은 신도 재판관도 아닙니다. 악인을 등장시키면 이야기는 알기 쉬워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관객들은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 일상으로까지 끌여 들여 돌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요.”

 

결국, 그의 ‘가족 영화’ 시리즈는 배태(胚胎)를 파고들어 요체(要諦)를 들춰내는 예술적 소산(所産)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인류 공통의 이념과 ‘집단 무의식’에서 최소단위집단인 ‘가족’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고정된 근원, 진리, 목적, 절대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가족에 있어서도 대립적 요소나 배타적 요소로 이원화할 수 없다. 자신과 타자, 내부와 외부, 남과 여, 선과 악, 빛과 어둠같은 것이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자유로운 치환’이 가능하다. 따라서 영화를 보고 나서 흑백논리로 헤게모니(hegemony)적인 가족관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지나서 재차 관람했을 때 받아들이는 감정적, 감성적, 지적 영역이 모두 다를 수 있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인간은 생애주기(life span) 전반에 가족이라는 인자에 속한 역할요인에 종속된다. 자녀-남녀-부부-부모라는 서사를 지닐 것이다. 따라서 같은 영화여도 공시적(共時的)으로 거듭 본다면 영화가 내포한 ‘의미’와 ‘의의’가 달라질 수 있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는 ‘기대의 지평’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의 리얼리즘론(realism)에선 작품이 인간, 자연, 역사간 복합적, 포괄적 관계가 풍부하다고까지 나온다.

 

 

6. 관객으로 평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츠의 영화들

 

필자는 쉽게 관객에게 답을 내어주지 않는 감독의 작법에 오히려 가경(嘉慶)스럽다. 적당한 장해(障害)는 관객의 사유를 도발한다. 이것이야말로 종합예술인 ‘영화’가 지닌 순기능일 것이다. 관객이 주체적으로 외연(外延)을 넓히게끔 감독이 가장 역점(力點)을 둔 부분이 바로 결말 부분은 아닐는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6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필두로 61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관객상, 32회 벤쿠버국제영화제 로저스 관객상, 56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37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남우조연상, 우수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배우 캐스팅으로 일본의 송강호에 비견되는 유명배우 릴리 프랭키(Lily Franky)가 유다이 역을 맡았고 아역 배우들도 호연(好演)해 톡톡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감독은 2018년에 <브로커>라는 한일 합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배우 이지은(가수 활동명은 아이유)이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남성주인공에게 초점을 두었다면, 여성주인공 서사로 젠더(gender)적 균형을 맞춘 것이 고무적이고 문화적 협업이 오간 것은 환영할 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츠의 작품은 사실주의적인 영화이지만,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파(新派)적 감성을 자아내지 않는다. 핵가족의 이면을 다양하게 설정한 점, 불편할 수 있는 감정 어딘가에서 관객의 주체적 참여를 유도한다. 자기복제(replicate)식으로 스토리와 플롯을 꾸리지 않은 채, 스타일에서 개성을 드러낸다는 점이 독보적이다.

 

가족해체나 1인가구가 늘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속한 우리네가 보기에도 울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다루었던 이유 또한 감독의 국적이나 작품 장르를 막론하고, 어떤 세대나 계층에게도 통용(通用)될만한 ‘주제의식’ 머금었다 생각해서다. 경쟁사회에서 주인공 료타같이 성과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세대와, 아이를 기르는데서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이미 겪었을 기성세대 모두에게 일본 특유의 감성으로 묵직한 일자(the one)를 제공할 것이다. 감독이 주창(主唱)하고픈 메시지로 관객을 강타하는 영화가 아니다. 인간의 순리(順理)를 곱씹어보는 리얼리즘이 때론 잔잔하게 위로와 실존의 아름다움을 건넨다. 필자의 마음 한켠 영화라는 파동(波動)이 지금도 피어나고 있다. 오늘 당신의 B(Birth)와 D(Death) 사이에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란 C(Choice)가 있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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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중,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 웨일북스, 2020.

 

 

[박빛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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