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에는 가끔 무지개가 뜬다 –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글 입력 2023.02.0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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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재생되는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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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디를 가나 공사 중인 건물을 지나치곤 한다. 재개발 중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어떤 공간이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삶의 배경이 아니라 그저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사유 재산으로서만 인식될 때, 오래된 것은 설 자리를 잃는다. 오래된 것들을 내버려 둘 줄 모르는 세상에서 기억과 역사는 과소 평가되고, 쉽게 지워져 버린다.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낡고 오래된 것이 들어설 자리 없는 세상에서 귀퉁이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연극의 배경은 재개발로 폐업을 하게 된 영화관, ‘레인보우 시네마’이다. 1978년 극장 문을 연 극장주 조범식과 그에게서 극장을 물려받은 아들 조한수, 그리고 그의 아들인 조원우까지 무려 40여 년, 3대에 걸친 기억이 깃든 곳이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점령한 지 오래인 세상에서 이제는 찾는 사람도 거의 없고, 최신 영화도 상영하지 않는다. 견디고 견디다 반전 없이 폐업이라는 결말을 맞게 된 극장에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3대 가족만은 아니다. 동네 이웃인 김정숙에게 이 극장은 한여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이고, 영상기사 박수영과 매점 직원인 송희원에게는 소중한 직장이기 때문이다. 


원래 극장을 매일 드나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극장 정리를 도와주겠다며 서울에서 내려온 원우와 그를 따라온 아르바이트 선배 태호까지 있으니, 오랜만에 레인보우 시네마가 북적인다. 이대로 따뜻한 분위기에서 훈훈하게 폐업 준비가 이루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다. 대외적으로는 선후배 사이인 원우와 태호는 사실 연인 관계이며, 원우가 일방적으로 기약 없이 태호를 떠나 고향에 왔다는 것이 극의 초반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된 극장 곳곳에 깃든 수많은 이의 기억처럼, 이 3대의 관계 속에도 쌓여 있는 기억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그 기억의 중심을 이루는 존재는 원우의 동생 원석이다. 성인이 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짐작되는 원석은 이 집안의 암묵적 금기어이고, 이 집안을 드리우는 오랜 갈등의 뇌관이다. 과연 가족은 무사히 폐업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영화관에서 오래된 필름을 찾아 상영을 시작하듯이, 이들의 옛이야기도 먼지를 털고 재생되기 시작한다.

 

 


각자의 인생이 한 편의 영화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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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이 다 아름답지는 않은 법. 잘 정돈되어 켜켜이 쌓인 기억은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지만, 파편처럼 흩어져버린 어떤 기억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찌른다. 찔리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아픈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고통에 익숙해져서 고통을 해결해야 할 의지조차 잃는다. 영화관 3대 부자는 조각나버린 원석의 기억을 각자의 마음에 묻었다. 작은 고통을 피하겠다는 명목으로 단절된 대화는 가족 관계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원석을 둘러싼 3대의 이야기가 연극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극장을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상처와 사연이 존재한다. 영상기사 수영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게 무서워 인형 탈을 벗지 못하고. 정숙은 치매 걸린 어머니를 홀로 힘겹게 돌보고 있다. 앞선 이들에 비해 희원의 사연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희원 본인에게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할 이야기일 것이다. 세상에서 밀려난 이들의 삶은 저마다 한 편의 영화 같다. 이들에게 극장은 세상으로부터의 피신처이자 세상에 나가기 전 준비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준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에두르던 이들은 비가 세차게 내려 정전이 되고 서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서야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감정이 폭발한다. 그러나 폭발한다는 것은 막혀 있던 것이 다시 흐르고 끊겨 있던 것이 다시 이어질 징조이기도 하다.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서로에게 쏟아내며 깨닫는 것은,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내가 아는 것을 당신도 으레 알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거나, 반대로 당신은 평생 가도 모를 거라고 속단했다는 것이다.


솔직해진다는 것, 무언가를 직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비가 온 다음에 무지개를 볼 수 있듯이 그 과정을 겪어야만 상처가 치유될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모두의 기억이 담긴 극장이 무너지고 나면 영영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문 닫을 날을 앞둔 영화관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레인보우 시네마에서 상영될 마지막 영화가 아닐까. 

 

 

 

폐업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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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폭풍우 치는 정전의 밤을 보내고 다시 화창한 여름날을 맞은 이들은 한결 편안해 보인다. 레인보우 시네마 사람들은 오랫동안 묵혀온 이야기를 털어내고 소강상태를 맞는다. 이들은 마지막 상영이 끝나기를 기대하며 ‘축 폐업’이 쓰여 있는 축하 메시지 장식을 벽에 붙인다. 폐업을 축하한다는 말이 그렇게 밝은 색종이에 쓰여 있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누군가 무지개를 발견하자 모두 우르르 구경하러 나간다.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연극이어서 끝이 명확하다. 폭풍 치는 밤을 지나 무지개를 만나는 것이 이 연극의 결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지개라는 것이 무언가의 끝이 아니라 날씨와 날씨 사이에 있는 찰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연극이 아닌 현실에서 레인보우 시네마 사람들의 삶은 곧 예전과 비슷하게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괴로움 사이를 오가며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말끔해진 마음에는 다시 상처가 생기고 오해가 쌓일 테다. 살아 있는 한 삶에는 완결이 없으므로. 그래도 괜찮다. 한번 무지개를 본 사람은 언젠가 다시 볼 무지개를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리는 비를 그치게 할 수 없듯이, 폐업을 철회할 수는 없다. 억울하게 죽은 원식이가 살아 돌아올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아 있다면 ‘그 다음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닐까. 비가 온 뒤 운이 좋으면 무지개를 만날 수 있고,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대화가 다시 시작되기도 한다. 이별 위기에 봉착했던 연인은 계속 관계를 이어가기로 한다. 그런 맥락에서는 폐업도 기꺼이 축하할 수 있는 일이 된다. 극장은 문을 닫지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이든 무지개가 뜨기 마련이니까. 

 

 

*사진: 극단 수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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