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공연]

박물관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글 입력 2022.10.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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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한 지 꼬박 한 달이 되었습니다. 늘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했던 터라 지금의 생활이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항상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크고 뚱뚱한 흰 컵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을 많이 마시는 편입니다. 식사 한번을 할 때도 몇 번이나 물을 몇 컵이나 마십니다. 그런데 내 흰 컵은 무척이나 커서, 컵 안 가득 음료나 물을 따라놓으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든든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집을 나온 요즘은 2L짜리 생수를 마십시다. 크고 무거운 페트병을 들고 물을 마시다 덜컥 물을 쏟아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흰 컵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흰 컵이 항상 내 곁에 있었을 때는 그저 집에 있는 많은 컵들 중 하나였는데, 막상 쓸 수 없게 되니 문득 소중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흰 컵은 본인의 방식으로 제 삶의 일부를 지탱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에 소홀해집니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고, 나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소홀해지는 것과 별개로 그것들은 항상 자리를 지키며 내 삶을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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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도 그렇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이 있습니다. 상설전시관에 있는 유물들은 항상 제자리를 지킵니다. 몇 백 년 된 이야기들을 품은 채로 묵묵히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설전시관에 조금 소홀합니다. 교과서에서 지겹도록 보았다는 이유로,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상설전시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건희전, 아즈테카전 같은 특정한 때에만 열리는 기획 전시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이 몰립니다.

 

지난 반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을 스무 번도 넘게 방문했습니다. 박물관에 20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캠페인을 구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상설전시관의 유물들이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아무리 사소한 유물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설전시관에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우리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지를 규명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유물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삶들이 우리를 현재에 있게 합니다. 유물들은 단순히 과거의 잔재로써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써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박물관을 지나칩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20대들에게 박물관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TBWA 주니어보드 친구들은 몇 달 밤을 새워 20대를 박물관으로 불러모으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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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탄생한 것이 <대박쌈박!국중박> 캠페인입니다.


캠페인의 첫 번째는 이머시브 연극 <살아-잇다>였습니다. 김홍도의 풍속도첩 속 인물들이 박물관에 살아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시주>를 통해서 점괘에 기대어 사는 불안한 사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막>은 아르바이트 생들의 고충을, <우물가>는 분명히 실패할 호감 표현법을 보여줬습니다.


박물관을 통해서 살아난 300년 전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미래가 불안해 점괘를 보고, 사랑을 하고 싶어 우물가를 찾고, 결혼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그저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과거와 현재의 생활은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어지는 삶과 감정의 고리가 분명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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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잇다>를 통해 관객들은 단순히 과거가 과거의 자리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이어지고 있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유물들의 이야기가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상호작용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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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박물관에서는 캠페인의 두 번째 연극인 <야간괴담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야간괴담회>는 유물들이 가진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입니다.


우리의 삶 도처에 비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박물관에도 아프고 무서운 목소리를 내는 유물들이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당시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던 소시민의 고통이나 찢어지는 가난에 자기 자신을 포기해버린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야간괴담회>는 그들의 이야기를 되살려놓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극이나 슬픔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합리나 슬픔을 돌아보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들을 돌아봄으로써 사람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소외된 유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내고, 나아가 관객들의 슬픔에까지 가닿는 것. 그것이 <야간괴담회>의 의미입니다. 슬픔을 이겨내는 힘으로 우리는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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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가치는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 속에 있습니다. 유물들 속에 있는 삶과 이야기, 마음들이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입니다. 유물들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가서 유물들을 천천히 살펴본다면 현재의 자신에게 유용한 생각이나 감정들을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유물들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입니다.


<야간괴담회>는 이제 마지막 공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유물 속에 얽힌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10월 26일 8시 15분에 국중박을 찾아오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준비물은 유물이 해주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열린 마음입니다.


오셔서 박물관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지를 실감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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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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