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삶에 자유를 - 베르히만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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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히 가로막힌 길. 어두운 골목길을 헤멜 때 아주 작은 촛불이 간절해진다.
어둠 속을 헤멜수록 자아는 수동적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깨부수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목표했던 곳에 당연히 도착하리라 하는 도전 의식도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위축된다.
이 때 나에게 다가와 조금이라도 눈 앞을 밝혀 줄, 혹은 기꺼이 손을 내어주어 나를 이끌어줄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될지. 그리고 그 위안은 단순히 위로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남는다.
수많은 창작자들에게는 거장들, 선인들로부터 얻는 영감이 그러한 감정으로 남게 되지 않는가 싶다.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는, 지금 눈 앞에서 당장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없더라도, 그들이 남긴 흔적과 발자취를 좇으며 침묵의 대화를 이어가는 일.
그러나 영감을 받는 일은 때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 대상이 자연물이나 무생물처럼 온전히 내 주관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가진 사람이 된다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온전히 나만의 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과, 더 기발한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마음의 대립. 영감을 찾아 떠나는 일은 두 마음 가운데 적절한 균형을 찾는 노력을 요구한다.
설령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외부로의 강한 자극에 나의 창작성이 휘둘릴 수도 있는 일이다.
미야 한센-러브 감독의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전설적인 영화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자취를 좇아 떠나는 한 감독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다.
포뢰섬,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감독이 대표작 <페르소나>를 비롯해 여러 명작을 연출했던 그 장소로. 영화사를 통틀어서도 무척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황혼의 시절을 포뢰섬에서 보냈을 정도로 그 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연의 삶에는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감독인 미야 한센-러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투영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영화의 인물들을 통해 자신이 포뢰섬을 바라보는 태도, 영화계의 명장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방향성이 관객에게도 꺠달음을 준다. 베르히만의 세계에서 포뢰섬이란 집착, 고통, 두려움과 같은 감정과 연루된 내면에 밀접하게 연계된 곳이었다면, 미야 한센-러브의 세계에서 포뢰섬이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는 매력적인 장소 그 자체로 변환된 것이다.
자신만의 시야를 찾아가고자 했던 감독의 마음이 느껴진다.
영화 밖의 감독, 그리고 영화 안의 감독, 그리고 영화 안의 감독이 그리는 극중 인물의 이야기.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영화 안팎으로 다양한 관계성이 얽혀 있어 극중 이야기를 다채롭게 확장하며 생각하게 된다.
주 인물인 '크리스'는 연인인 '토니'와 함께 포리섬에 향할 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는 연인과의 관계와 감독으로서의 예술가적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을 이어가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포뢰섬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작품의 시나리오를 작업하려는 크리스. 제 연인인 토니가 모든 것을 무리 없이 진행하며 크게 힘겨워하지 않는 모습과는 달리, 크리스는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것 자체를 자해라고 칭할 정도로 괴로워한다. 또 이러한 고통스러운 마음을 토니에게 터놓으며 이해와 공감, 치유를 기대하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리 오래된 연인이더라도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변화하는 상황과 감정, 마음, 관계. 그 가운데 크리스의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에이미'가 교차해 등장하며 한층 성장해가는 크리스의 모습을 투영한다. 에이미 역시 행복과 불행의 시간을 오가며 경혐하면서, 자신의 깊은 곳에 내재된 창조적 정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크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다다른 마지막 장면. 크리스는 토니와 함께 포뢰섬에 찾아온 딸과 순수한 기쁨으로 포옹을 나눈다. 크리스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
거장의 그늘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리고 운명적 관계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 무엇보다 자신만의 창조성을 존중하는 것.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세상 속에 서 있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관찰한 베르히만과 달리, 우리 삶 속에 있는 빛을 발견하고자 한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메세지가.
온전히 나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며 나아가는 삶, 당연하지만 간과하고 지내는 마음의 이치에 귀 기울이게 되는 영화였다.
[신은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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