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담백 칼칼한 오해를 위하여 [도서/문학]

이슬아, 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문학동네, 2021)
글 입력 2022.07.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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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하겠습니다.

 

책을 사고도 한참 후에야 이 서평을 씁니다. 조막만 한(?) 물성을 가진 이 책은 제 작은 책장 한가운데 오랜 시간 꽂혀 있었습니다. 돈이 궁할 때는 좀처럼 책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거의 항상 궁하기 때문에 책을 잘 안 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아주 가끔씩, 확실한 물질적 궁핍함을 넘어서는 아득한 정신적 결핍함이 찾아오는 때에, 출출한 날 홀린 듯 멈춰서는 길거리 떡볶이처럼 책 맛에 구미가 확 당기는 시기에, 몇 권이고 책을 몰아서 삽니다. 이 책은 그 시기에, 아마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입니다.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매일과 완독일의 긴긴 차이는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읽었습니다. 솔직히, 각 잡고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거든요. 가끔씩 피곤에 찌들어 다른 어떤 책도 읽을 엄두가 안 났을 때, 거리두기를 핑계로 외로운 밤 유쾌한 당신들의 수다에 끼고 싶을 때, 유려한 글로 유창하게 치고받는(대체로 치는 쪽은 한 명이었습니다만) 당신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을 때, 슬쩍, 꺼내 읽었습니다. 물론 저의 그런 독서 방식을 당신들도 매우 흡족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까르보나라적” 글쓰기에 “소량의 징그러움”을 느끼는 작가들이라면 독자들도 그들의 글을 “순두부찌개적”(19쪽)으로 담백 칼칼하게 읽어주길 바랄 테니까요. 건전한 비판을 위해 빅데이터 통계분석까지 사용한 이슬아 작가님의 지독함과, 반성하는 척 이슬아의 불호령을 슬쩍 흘려 넘기는 남궁인 작가님의 음흉함 덕에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 길고 빡빡한 삶에서 킬링타임―시간 죽이기는 좋은 글이 가져야 할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책 전체는 단순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써서 보낸다 → 꼼꼼히 읽고 힘껏 답을 고민한다 → 그러는 와중에 생긴 새로운 감상을 담아 답장을 보낸다.' 숨 막히는 서스펜스도, 소름 돋는 반전도, 왈칵 쏟아지는 감동도 없었지요. 다만 ‘읽는다’와 ‘쓴다’의 무수한 반복 사이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신에 대한 성찰의 언어가 은밀하게 괄호 쳐져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은 그 괄호 속에 남겨둔 말과 행동이 이 서간문의 핵심이라고 느낍니다. 서로 받는 이를 위해 고민하다가 결국엔 쓰는 자신을 슬쩍 돌아보는 것. 편지의 완벽한 순기능입니다. 요즘은 그런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일련의 현상을 ‘케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책은 이슬아를 믿고 샀습니다. 과감히 “선빵을 날”(21쪽)릴 줄 아는, 파격적일 만큼 솔직한 글을 쓰는 작가. 실제로 만나면 눈을 내리 깔아야 할 것 같은 사나운 성깔의 소유자이자,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여서 무서운 사람. 충격과 공포에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느낌으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했기에 저릿해지는 오금을 다독이며 책을 집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실 이슬아의 정체는 “선생님이 살아 있는 게 너무 좋기 때문”(112쪽)이라는 낯간지러운 고백도 서슴없는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또한 충격과 공포인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만. 편지의 수신자이자 또 한 명의 발신자인 남궁인은 현직 의사라고 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듣보잡(?) 의사 나부랭이가 자아실현을 위해 글을 쓴답시고 잘난 체하며 의학 상식을, 혹은 남들은 평생 해보지 못할 시시껄렁한 무용담과 인생의 배부른 감상평이나 늘어놓겠지 싶었습니다만, 아뿔싸, 제 식견이 매우 짧았습니다. 남궁인 현직 의사이자 작가님은 제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 유명함이 이해될 만큼 부드럽고 섬세하게, 또 많이 쓰는 사람이더군요.

 

작가로서의 남궁인은 가히 이슬아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슬아의 필법이 직선적 당랑권이라면 남궁인의 필법은 유연한 태극권. 두 고수가 서로의 명치를 향해 주고받는 합은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슬아만의 책과 남궁인만의 책도 다시 읽어보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궁하므로 아직 책을 사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오해에 대하여 얘기해야겠습니다. 사나운 이슬아와 듣보잡 남궁인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저는 많은 것을 오해하며 살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관계’입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정작 혼자인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 타고난 아싸지만 인싸인 척하며 기어코 무리 속에 살아남는 사람. 그게 저입니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외로움은 막연히 무서워서 언제나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면 사람들이 좋아해 줄 거라는 시시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사이가 되려면 좋은 말과 좋은 행동만 필요하다고. 그러나 두 분이 주고받은 서신을 읽으며 새삼 깨닫습니다. 두 분은 서로를 너무 좋아했고, 그렇기에 더욱 서로에게 솔직하고자 노력했다는 걸요. 서먹한 사이에 진짜 우정을 싹틔우기 위해선 당연히 오해를 풀어야 하며, 그걸 위해 때론 따끔한 불호령도, 구차한 변명도, 서로의 명치를 겨냥한 주먹질도 필요하다는 것. 솔직한 오해는 이해를 위한 단계라는 것, 이것이 이제는 오해를 풀게 된 오해에 대한 오해입니다.

   

어떤 지점에서든 오해를 풀려면 지독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두 분은 그 귀찮고 피곤한 과정을 매번 꼼꼼하고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그런 종류의 성실함에서 탄생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기에 유명하고 좋은 작가인 두 분은 곧 위대한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감을 품습니다. 아직 두 분의 팬이라고 말하기엔 이릅니다만, 곧 그렇게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또 한 권, 책을 사서 보겠습니다. 모쪼록 두 분, 오래도록 우정하십시오.

 

 

- 2022년 어느 여름, 오해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된 한 독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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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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