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아 숨 쉬는 음들을 조각하는 법 - 피아니스트 조재혁 리사이틀

그가 보여주고자 한 쇼팽
글 입력 2022.06.16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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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조재혁의 쇼팽 음반 발매 기념 리사이틀이 잠실 롯데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조재혁은 "감성과 지성을 겸비하고 흠잡을 데 없는 테크닉과 구성력, 뛰어난 통찰력과 과장 없는 섬세함으로 완성도의 극치를 추구하는 매력적인 연주자"로 평을 받으며 다양한 형태의 연주로 연 중 60회 이상 무대로 오르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연주가이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조재혁 피아니스트는 쇼팽의 발라드 4곡과 피아노 소나타 제 3번 나단조를 연주해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청중들과 피아노로 소통했다.

 

포스터_쇼팽(최종).jpg

 

평소 클래식을 드문드문 듣던 입장에서 쇼팽을 만날 기회를 얻은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쇼팽이라면, 그 유명한 녹턴 2번의 작곡가 아니던가? 그 옛날 피아노를 배우며 쇼팽의 녹턴을 얼마나 치고 또 쳤던지. 빠르게 치는 것이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라 생각하던 나는 녹턴의 진가를 알지 못한 채 여기저기 손을 놀리기만 바빴고 그건 결코 듣기 좋은 피아노 곡이 될 수 없음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시절 내가 집착했던 것은 곡의 분위기와 감정을 살린 연주가 아니라 오로지 빠르기였다. 녹턴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곡들, 이를테면 베토벤의 비창과 엘리제를 위하여,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바흐의 미뉴엣 G장조,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와이먼의 은파 등등 우아한 분위기의 곡들을 시간에 쫓기듯 몰아쳤으니 내 연주가 얼마나 엉망이었을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속주에 미쳐있느라 정확한 터치, 음의 연결성과 같은 다른 테크니컬 요소들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그건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내내 내가 지적 받던 사항이기도 했다. 그렇게 빨리 연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 빠르기 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조금 더 섬세하게 연주할 것, 그리고 일부 파트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할 것. 그런 것을 염두에 두려 애썼지만, 피아노 연습 말미에는 항상 속주로 끝맺음으로써 원템포 유지를 모조리 잊어버렸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내가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듣긴 했다만, 아무래도 그건 뒤에 나올 아쉬운 점을 이야기 하기 위한 빌드업 차원에서의 칭찬이었던 것 같다. 즉, 칭찬을 가장한 지적이란 얘긴데 난 줄곧 앞의 내용만을 기억하며 '더 빠르게, 더 빠르게'를 외치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난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던 듯 하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몇 년이 지난 후부터 클래식 FM 라디오를 즐겨 듣기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쳤던 곡들을 다른 연주자의 손을 통해 들으니 그때서야 비로소 곡의 제대로 된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쳤을 때는 정신없고 주제 없는, 텅 빈 곡이었는데, 어째서 지금 들리는 곡들은 나와는 다른 점이 느껴지는 거지? 왜 나의 녹턴은 지금 들리는 저 녹턴과 다르지?

 

 

Jae-Chopin_음반이미지.jpg

 

 

나에게 쇼팽이란 곧 녹턴이었다. 쇼팽의 유명한 곡이라 하면 흑건도, 즉흥환상곡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난 녹턴이 제일 좋았다. 어린 시절 잠 들기 전 자장가로 들었던 기억도 나고 내가 직접 연주했던 곡이기도 하니, 애정이 가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녹턴을 작곡한 쇼팽곡 리사이틀이라니.

 

이번 리사이틀에서 조재혁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쇼팽의 곡은 발라드 4곡과 소나타로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음악들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 좋았다. 내가 알던 쇼팽이 아닌 다른 모습을 가진 쇼팽을 보는 일이니까 말이다. 무슨 곡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애정했던 쇼팽이니만큼 큰 기대를 가지고 롯데 콘서트홀을 찾았다.

 

쇼팽의 발라드는 하나의 서사 구조가 명확한 문학 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모든 발라드가 좋았지만,그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고 '쇼팽의 천재성이 잘 나타난다'는 극찬을 받은 1번 사단조가 인상적이었다.

 

리사이틀 첫 작품, 쇼팽 발라드 제 1번 사단조의 첫 음은 10분의 긴 이야기에 구심점을 세우는 역할을 하듯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아주 강렬하고, 장중하다. 단 몇 초 동안 단 두 개의 음이 연주될 뿐이지만, 그 짧은 과정 속에서 쇼팽은 이렇게 외친다. 보라, 이 이야기의 서막을. 기억하라, 이 찰나의 순간을. 그리고 이어진 아름다리우리만치 예술적인 상향 연결음은 우리를 거대한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사이사이의 정적은 대서사시를 위한 여유라고 느껴질 정도로 우린 발라드 1번에 몰입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유명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곡 전반부는 깊고 깊은 고독의 과정이자 인내의 과정이다. 차분하면서도 절제된 터치, 그 속에서 들리는 묵직한 저음은 한 인간이 절망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조금씩 빨라지는 템포, 엄숙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화려한 기교로 나아가는 중반부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만다. 그리고 곡의 후반,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조재혁 피아니스트의 주도적이고 현란한 움직임에 한 번, 곡의 절정 부분에서 갑자기 툭 끊어지는 듯 한 머뭇거림에 두 번, 마지막 모든 것을 쏟아내고 탈진한 듯 모든 걸 내려놓는 마무리 터치에 세 번 놀라고 만다.

 

아, 이것이 쇼팽이구나. 쇼팽이 그려낸 세계는 피아노 위에만 머물지 않는구나. 이것이 조재혁 피아니스트가 보여주고자 한 쇼팽이구나. 내가 알던 쇼팽은 빙산의 일각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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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한 쇼팽은 그저 빠르기에 치중되어 있었고,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강약-능수능란한 템포 조절, 그리고 자신의 색깔을 담은 감정 표현으로 이토록 풍부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곡을 작곡한 쇼팽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불어 그걸 실현시킬 손과 감성을 가진 조재혁 피아니스트 또한 대단하다 느꼈다.

 

리사이틀은 단순 악기 연주회가 아니다. 관람객들과 음으로 하나되는 비언어적 소통의 장이다. 피아니스트는 자신이 해석한 곡을 들려주며 곡에 대한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고 관람객은 피아니스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음의 분위기와 색채를 읽어 간접적인 대화를 나눈다.

 

난 그것이 문화 예술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피아니스트와 관람객의 소통, 관람객과 관람객의 소통, 그리고 무색무취무형의 음들과 지속적인 소통. 그것이 이번 리사이틀에서 내가 중점적으로 본 체크 포인트다.

 

음악 또한 소통이다. 난 그것을 이번 리사이틀을 통해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약 다음에 녹턴을 연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전과는 다른 녹턴을 연주할 테다. 내가 가진 본질적인 감정을 담고, 그것이 잘 전달되도록 연주하여 함께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애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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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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