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 [사람]

유년시절, 학창시절의 맹랑한 상처
글 입력 2022.05.1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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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린 시절 내밀한 아픔을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것 같다. 크면서 이제는 묻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에 언제까지나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처투성이의 청소년기를 섬세하게 포착한 소설도, 노래도 꽤 있다. 왜 우리는 아프면서 커야만 했을까. 그 아픔은 왜 시간이 지나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 상처는 조금 더 은밀하고 깊숙하게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도 당연히 그런 상처를 조금씩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생 때 반 전체가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 손을 드는 벌을 받았다. 당시에는 몇십 분씩 그렇게 단체로 벌받기가 예사였다. 저린 팔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저 사람은 뭔데 우리에게 고통을 줄 권리를 가진 거지?’ 얼마나 자주, 오래 아이들에게 손을 들게 하는 벌을 내렸으면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필자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일까?

 

유치원 때는 종일반 열쇠가 없어지는 일이 있었다.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종일반 선생님은 몹시 무섭기로 유명했다. 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원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바닥에 고개를 수그리고 앉았다. 선생님께서는 누가 가져갔는지 지금 이야기하면 용서해 줄 테니 열쇠를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들라고 하셨다. 필자는 당연히 범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바닥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있으려니 허리가 아팠던지, 조금 움직였었나 보다. 갑자기 원장 선생님께서 필자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너야? 네가 훔쳤어?”라고 소리를 치셨다. 너무 놀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니요...”라며 더욱 고개를 숙였던 기억이 난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필자가 의심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 억울했던지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고등학생 때는 대체로 힘든 시간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했지만, 이때에도 역시 조금씩의 상처가 남아있다. 사소한 일들로 반 전체에게 육두문자를 내뱉으시면서 ‘이런 거 가지고 신고하지 마라’라고 하던 교사, 전교 석차에서 필자의 이름 위치를 가리키며 “목표하는 대학을 가는 학생들이 보통 여기인데 넌 지금 여기 아래야. 보이지?”라고 하시던 담임 선생님. 이런 기억은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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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교육 봉사 활동을 해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하게 만나보았고,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 국어와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다. 언제나 최우선으로 지키고자 했던 생각은 ‘절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희망을 꺾는 언행을 하지 말자’였다. 필자가 받은 상처들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지 몰라도, 언제나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 봉사를 꾸준히 하며 필자도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또 대학생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정말로, 또래 친구들이 교생 선생님으로 실습을 많이 나가는, 선생님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나이가 되었다. 거의 정식 선생님의 나이가 된 필자는 매주 아이들을 만나며 이런 생각을 한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가르치는 사람이 편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거나, 상처를 주거나, 사고를 가로막을 수 있다. 부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긍정적이지는 않다.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사실 별로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굉장히 미묘해서 언제든 넘을 수 있고 곧바로 아이들에게 맹랑한* 상처로 남을 수 있는, 그래서 사실 매우 조심해야 하는 선이다. 넘기는 쉽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 상처의 무게가 가볍지는 않다. 쉽게 쉽게 넘는 만큼 아이들은 매번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왔다.

 

*<맹랑하다> 3.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고 묘하다.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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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자꾸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 그 학생에게 가만히 앉아서 집중해 보자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수많은 방법으로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더욱 센 표현을 사용할수록 학생이 가만히 앉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예를 들어 이런 말을 해보면 어떨까. “가만히 좀 앉아 있어 볼래? 부모님께서 네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계실 텐데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시겠니?” 혹은 비교를 할 수도 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열심히 앉아있는데 친구만 계속 움직이네요?”

 

별로 심한 표현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가 저 말을 듣는 학생이었다면, 분명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 말은 어떤 선을 넘었다. 미묘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지라도 분명 선을 넘었다. 필자가 추측건대 저 말에는 우선 기본적인 억압이 깔려있다. ‘학생은 누구나 마땅히 재미없는 수업 시간에도 억지로 의자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사고를 강요하고 있다. 다들 한 번쯤 ‘똑같은 교복 똑같은 책상 쳇바퀴 같은 시간표(...)’에 대한 불만을 품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누구도 다른 사람이 억지로 무언가를 하게 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두 번째로, ‘의자에 가만히 앉지 못한 일은 너의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창피를 당할 만큼 크게 잘못한 일이다’라는 이야기가 저 안에 깔려있다. 기본적으로 의자에 앉아있지 못한 행동이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것부터 부당한 억압이 될 수 있는데, 그 ‘잘못’을 저렇게나 부풀려뒀으니 학생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의자에 앉히기 위해 꺼내든 표현이 사실은 수치심을 유발하는 비난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그저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싶어 내뱉은 말이 실은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볼 수도 있다. 유치원생이 자꾸만 더러운 손가락을 빨려고 한다. 그러면 선생님은 아이가 손가락을 빨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며 아이가 손가락을 빨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그냥 “손가락을 빨면 세균이 입에 들어가서 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표현 방법이 있다. “손가락을 빨면 그 안에 있는 세균이 친구 몸으로 들어가서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괴물이 될 거예요. 그래서 친구를 아무도 모르게 결국 잡아먹으려 할 거예요. 친구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싫죠?”

 

이렇게 말하면 아마 아이들은 절대로 손가락을 입에 넣지 않을 것이다. 너무 무서우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그날 밤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자신이 이미 입안에 넣었던 손가락을 떠올리며 몸속에서 무시무시한 괴물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달려들까 봐 밤잠을 설치지는 않을까?

 

아이들과 상호작용을 하면, 정말로 매 순간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직설적이고 조금은 더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될까. 아주 조금, 아주 미묘한 수준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생각보다 이들이 더욱 순수하고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편한 방식으로 아이들과 소통할수록 아이들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통제하기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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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말씀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나이다. 자신에게 조금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면 당시에는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미묘하게 선을 넘은 말들이 어떤 방어도 없이 그대로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 그 상처가 굉장히 크게 오래 남는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선을 넘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기억은 못 해도, 우리는 다들 선을 넘은 말 한마디씩 마음속에 품고 있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르치는 본인은 안다. 방금 뱉은 말이, 혹은 방금 뱉으려 했던 말이 미묘하게 선을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 말이다. 무슨 말을 할지는 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선을 넘기는 무척 쉽다. 선을 지키기는 몹시 의식적이고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나이가 되어 필자에게 특히나 큰 상처로 남아있는 선생들을 떠올려보면, 다들 하나같이 비겁하다.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관계 속에서 무심코 상처가 되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는 대체로 어색하게 웃으며 넘기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아는 것도, 힘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에게 마음대로 아이들을 대할 명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른길로 인도한다는 명분으로 어른의, 선생의 힘을 휘둘러도 되는 것일까. 정말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그저 문득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이 언제든 무심코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게 필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수많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언제까지나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생각을 하니 말이다. 언젠가는 모든 어른이 아이를 억압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회가 올 수 있을까. 필자가 크게 바꿀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필자가 가르치는 아이들 앞에서 선을 넘지 않도록.

 

 

[정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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