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관찰자가 서술자가 되는 시간 - 설화와 소설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1.1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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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특정 집단이 읽고 소비해온 시간이 긴 만큼 공적인 해석이 대대로 전해지곤 한다. 반면, 소설은 개인 독자들의 감상이 모여 기존의 의미 구조를 바꾸기도 하는 말랑한 텍스트이다. 설화의 특성을 계보성, 소설의 그것을 독립성이라 칭할만 한 지점일 것이다.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설화는 불에 단단히 구워 안정된 사기 그릇이고 소설은 아직 굽지 않아 어떻게 뒤틀릴지 모르는 토기이다.

 

그러나 창작자란 응당 굳어져있던 설화적 메타포에 당대 현실이라는 부싯돌을 부딪힐 줄 알아야 한다. 설화가 지닌 새로운 의미가 스파크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설화처럼 매끄럽지도, 명확한 교훈이 있지도, 그럴듯한 질서가 지어져 있지도 않은 우리의 혼돈을 닮은 삶을 어떻게 설화라는 거울에 비춰 볼지 고민해야 한다.

 

제15회 황순원 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이러한 관점에서 인상적인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해당 작품은 삼국유사의 설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서브텍스트로 삽입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설화의 계보성을 소설의 독립성으로 매끄럽게 전환한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 서술자의 존재, 그리고 서술 방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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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과 설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교차 감상하며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을 포착했다. 설화는 대개 서술자가 특정되지 않는 반면 ―구태여 정의하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한다― 소설은 보다 자유로운 시점을 허락받으며 서술자가 명시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서술자 k는 관찰자로서 살아온 시간이 길다. '경주언니'와 '임선배'의 관계를, 신입으로 입사했을 때의 회사 풍경을 죽 관찰해왔다. 경주언니와 임선배는 관찰자 k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저 악착같이 살아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펼쳐나가는 것으로 관찰자에 대한 예의를 다 하는 것이다. 계속 보라고, 곁에 있으라고, 끊임없이 해석하고 이해를 멈추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의 선택은 어찌 보면 적절했다. 관찰자가 곧 서술자, 나아가 창작자를 자처하게 되는 것처럼 k도 희곡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서술자를 특정하는 건 서사에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다. 특정 존재만의 고유한 시각과 해석, 판단을 덧씌워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뜻이다. k라는 서술자 역시 과거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태도, 표층을 훑으면서도 두 타자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고백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그러나 경주언니와 임선배에 비해 이름이 특정되지 않은 점, 주체로 표상되는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지칭된 점 등은 서술자가 됨으로써 다소 흐려진 그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 

 

어쩌면 체온에 녹아내리는 한 송이의 눈처럼, 관찰자가 서술자가 되어가는 건 스스로를 경험에 녹여내고 흐리게 하는 과정과 같다. 그것이 k가 보여주는 프레임이다.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 누구든 넣을 수 있을 만한 설화적 서술자를 닮아 있기도 하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밖과 안의 경계, 그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k는 설화 속 소녀가 관음보살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깔끔한 해피엔딩을 긍정하기에는 그가 본 세상은 너무나 굴곡져 있기 때문일 테다. 여기서 k를 소녀의 존재에 비춰볼 수 있다. 소녀는 밖에서 안으로 진입한 존재이다. 우선 절 밖의 존재가 안으로 들어왔다는 공간의 이동이 표층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심층에는 해석을 기다리는 의미들이 있다. 

 

설화 속 소녀는 극상의 가치와 가르침을 안고 그것이 결핍된 안쪽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이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k가 그리는 소녀는 여체화되었다는 이유로 세속과 타락을 뜻하는 거대한 상징도 아니고, 누군가를 깨우치게 할 관음도 아니다. 그저 고통의 밖에서 안으로 진입한 평범한 사람이다. 예고치 않은 상실을 겪고 더이상 바깥에 머물 수 없게 된 사람이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의 꿈을 꾸는 소녀는 상실과 고통의 안쪽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k역시 마찬가지이다. 경주언니와 임선배는 모두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서사는 그들이 세상에서 잊혀질 속도로 k 안에서 생생히 살아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찰자는 서술자가, 그리고 당사자가 된다. k는 사실 처음부터 충분한 당사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서 관찰자됨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당사자됨을 인식하는 것, 고통의 안에 있는 자로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기분에 시달리는 것, 그것을 서사의 그릇에 담아 내는 것은 모두 상당한 공부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서술자로서의 k는 이제 대문자 K가 될지도 모른다. 김OO라는 구체성을 지닌 채 익어갈지도 모른다. 끝까지 쓰지는 못하더라도 쓰기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 것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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