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21세기 인간의 필수적인 상상력 - 최재천의 곤충사회

글 입력 2024.03.0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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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롤 모델이 누구인지 묻는 문화가 있었다. 명확한 기준은 없었으나 세종대왕 같은 위인부터 유재석처럼 잘나가는 연예인들을 답하곤 했다. 당시 나에게 롤 모델은 유명한 사람 정도의 무게를 가진 단어였다.


누구처럼 되고 싶은지 아무도 묻지 않는 지금에서야 이 언어의 힘을 실감하고 있다. 롤 모델이란 곧 내 삶의 궤적을 짜내려 갈 수 있는 기회이자 상상력 그 자체다. 막연한 공상을 구체적 실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생생한 증인이다.

 

사회적 성공 같은 물질적 개념보단 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떠올릴 때 앞선 이들의 삶은 큰 힘을 발휘한다. 선대의 발자취를 힌트 삼을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영역을 창조할 수 있고, 그렇게 저마다의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순환되고 깊어지고 늘어날 수 있다.

 

자연을 애정하고 지키고 싶은 이들, 다양성을 지향하는 이들, 공정과 겸손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특히 든든한 롤 모델이 필요하다. 쉬이 폄하되고 무시되는 가치를 귀히 여기는 지난한 운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시대 한국을 살아가는 여린 파수꾼들에게 큰 행운이 있다. 자연과 다양성과 공정과 겸손을 부지런하고 구체적으로 수호하는 최재천 교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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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곤충사회>는 유튜브, 강연,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 중인 최재천 교수가 10여 년 동안 진행했던 강연을 바탕으로 쓰인 에세이다. 철부지 대학생부터 저명한 생태학자가 되기까지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다수 포함하기에 생태학 교양서이자 최재천이라는 한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생태학자로서 수많은 종과 자연공간을 분석한 그에게 가장 돋보이는 건 공정하고 다정한 시야다.


“태초부터 인간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생물이 존재했던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인간에게만 머물지 않는 눈을 선언하기에 그의 이야기를 곤충의 사회상 조명 혹은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 비판으로 예상하기 쉽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단순히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하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방식은 그의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오독에 가깝다.


최재천 교수의 생태학은 사회학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했다. 그의 근원적인 궁금증은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현상과 구조에 있다. 흐릿했던 시야를 맑게 해준 결정적인 렌즈가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였기에 그 관심이 생태학으로 뻗어나갔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태학적 시선과 사유가 인간에게로 향하는 건 자연스러우며, 해당 도서 역시 자연 군상에 관한 분석이 인간 사회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문학과 사회학과 생태학 등이 고루 섞인 이야기는 서로 다른 것들의 통섭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를 또렷하게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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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통섭과 다양성을 지겹도록 강조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서로 돕고 살며 다양성을 유지하는 존재만이 자연에서 생존해왔고, 인간은 그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껏 자연계에서 찾아보지 못한 신기한 존재이며 어떤 동물보다도 탁월한 두뇌를 가진 생명이라고 칭한다.


동시에 “제 꾀에 넘어가는 아주 어리석은 헛똑똑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순간의 과욕으로 스스로 종말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계에서 “가진 자”로 군림하는 1만 년 동안 지구상 1퍼센트에 불과했던 인간의 무게는 99퍼센트로 늘어났다. 딘 1퍼센트의 공간에서 인간과 관련 없는 종들이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자연이란 다수의 종을 소멸시킴으로써 소수의 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최재천 교수는 말한다. 오히려 살기 위해 강한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협동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전체 생태계가 어떤 방식으로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중 하나가 틀어지면 얼마나 거대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그의 사례는 인간이 지금까지의 관성을 멈춰야만 함을 시사한다.

 

실제로 대다수 학자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분탕질”로 6차 대멸종이 도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앞선 다섯 번의 멸종과는 달리 지구의 지배자인 식물이 타격받는 유일한 경우이기에 그 규모는 역대 최대라는 사실에도 이견이 없다. 먹이사슬의 바닥을 담당하는 식물, 그 위를 담당하는 곤충은 이미 사라지고 있으며 이는 곧 어마어마한 식량 대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식량 대란은 근본적인 생존방식의 파괴라는 점에서 인간이 쌓아온 문명의 해체, 즉 치열한 아수라장을 암시한다.

 

그는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생존한 이들의 후예인 현대 모든 인간은 상생의 DNA가 남아있지 않음을 토로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 방법을 배우고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가진 자"이기에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발자국 하나도 신경 쓰면서 내디뎌야 한다는 그의 말은 인간에게 부족한 겸허한 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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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진 상상력의 대안 역시 자연에 있다. 자연 속 생물을 모방하는 학문인 의생학과 관련하여 소개되는 곤충과 동물의 생존전략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모든 것이 협동과 공정한 경쟁이라는 조건 아래서 생존하고 사라진다. 인간도 이미 오래전부터 채택해 온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자연을 침략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비판할 수밖에 없지만, 그의 말은 결국 다정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누구보다도 냉소와 회의에 빠지기 쉬운 위치의 최재천 교수는 그럼에도 인간의 양심을 굳게 믿는다. 그 양심은 자연과 인간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도 흔들림 없이 믿는다.


실제로 다양성 감소 문제는 자연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많은 병폐를 일으키고 있다. 최재천 교수 역시 다양한 존재와 삶의 방식을 말살하고 있는 집단이 결코 건강할 수 없음을 호소한다. 그가 자연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간의 절대적인 책임을 역설한 만큼, 인간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득권의 공정과 양심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다.


기후 위기에서 먼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낮은 위치’의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은 사회의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에서 진행한 졸업 연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가 가진 힘과 영향력은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중요한 재료이므로 끊임없는 성찰과 올곧은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힘은 부정한 요행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정도만을 걷는 여유와 운명을 우리는 타고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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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인간과 자연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결국 겸손이다. 평생을 저명한 연구자와 협업하고 한 분야의 최고 권위를 얻은 생태학자가 내린 결론이 겸손이라는 것이다. 전문가의 권위라는 것이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나는 의심 없이 그의 겸허한 마음을 닮을 것이다.


그가 말한 ‘아래’에서 본 자연은 다채로운 상상이 가득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속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인간 사회의 난제를 풀 열쇠가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최재천 교수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모두의 롤 모델이 되어야 옳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상상력이 이곳에 있다. 그의 냉철하고 다정한 이야기에 빠져들면 이전과는 결코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으리라 믿는다. 아니, 반드시 같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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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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