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리의 우물에서 벗어나기

글 입력 2024.05.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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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의 우물을 벗어나고 싶다.

 

언제쯤 무리하지 않는 일상을 손에 쥘 수 있을까. 머나먼 곳으로 몸을 옮기면 이전과 달리 보다 평온하고 여유로운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기대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어느덧 100일 넘게 홀로 해외에 사는 지금. 벌써 4일이 넘도록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골골 거리며 누워있다. 천성이 반나절 이상 집에 있으면 몸에 가시가 돋치는 사람이라 이런 일은 삶에서 극히 드문데도, 쉽사리 한 시간 이상 앉아있지도 못하고 있다. 열이 나고, 목은 가시가 낀 것처럼 칼칼하고, 코는 누가 구멍을 뚫은 것처럼 몇 시간이고 콧물이 새어 나와 미쳐버릴 지경이다.

 

또 무리를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와 체력 그 이상을 살아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보고 싶은 것이 그리도 많아서.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나중에 돌이켜보면 뒤늦게 한탄할까 봐. 수십 가지의 변명을 정당화하며 또 그만 무리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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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해외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호주에서 가장 큰 동물원인 타롱가 주에서는 생일자에게 당일 1달러 티켓을 준다. 원래 성인 입장료 가격으로 50달러가 훌쩍 넘는 가격인데 생일 당일에는 거의 무료 티켓을 주다시피 파격적인 마케팅을 한다. 이 소식을 같은 기숙사, 같은 생일자 동생에게 들었다.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관광지에 단 돈 1달러만 주고 생일을 즐길 수 있다니. 무조건 생일에 동물원을 마스터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달 전부터 나름 목이 빠져라 기대를 했다.

 

그런데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5월 중순의 호주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전환의 계절이 되었다. 아침에는 흐린 줄만 알았던 하늘이 점점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비바람으로 말썽을 부리기 시작. 갑자기 천둥번개를 치며 비가 내린다. 이미 30분 넘게 버스를 타고 시티 중심가로 도착해, 페리를 타기 직전이었다. 미친 듯이 고민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춥지 않았던 날씨를 믿고 외투를 안 챙겼다. 점점 추워진다. 이대로라면 동물원을 가는 게 이상한 날씨가 된다. 큰일 났다.

 

‘돌아갈까?’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1달러 티켓은 어쩌고?’

 

‘나중에 아깝게 50달러 주고 오게?’

 

‘뭐하러 무리까지 하면서 가. 이건 아닌데’

 

‘어쩌지? 집으로 가면 너무 허무할 것 같은데.’

 

‘…그냥 가자. 어떻게 되겠어?’

 

결국 언제나 무리를 하는 관성에 이끌렸다. 예정대로 강행. 동물원에 갔다. 땅덩어리와 하늘이 기막힌 밀당을 하는 거대한 돔 속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리를 선택한 대가를 치렀다. 방금 전까지 밝은 태양이 얼굴을 비췄다가 갑자기 후드득 비바람이 깜짝 놀래키고, ‘집에 돌아갈까’ 하면 금세 화창해질 기미가 보이고 또 머지않아 바람이 머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희망을 놓을 수 없게 하는 햇빛과 얼른 돌아가지 않고 뭐 하냐며 재촉하는 비바람이 마음을 이등분으로 완전히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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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보다는 희망을, 포기보다는 긍정을 지향하고 살아왔는데. 이럴 때만큼은 제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까.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기까지 정말 애매하게 두세 시간이 남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오면 거의 이동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다 써야 했다. 또다시 결정의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나는 미련한 걸 알면서도 이 생일의 하루를 꽉, 꽉 채워보내고 싶어서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비는 아까보다 더더욱 세차게 내린다. 겨울비만큼 차가워진 공기. 단 두 겹 입은 가디건을 손가락 끝까지 댕겨 올리며 몸에 열을 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뉴타운의 작은 와인바에 들려 와인과 생선 요리를 시켜 1시간 정도 멍을 때렸다. 오늘같이 미련한 날은 앞으로의 삶에 어떻게 기억될까.

 

저녁에는 친구들을 만나 댄스 공연을 ‘기어코’ 봤다. 같은 기숙사에 사는 절친이 댄스 퍼포먼스를 하는 데 “네가 와줬으면 좋겠다”라며 생일선물로 티켓을 줬다. 제안을 받은 당시에는 생일날 저녁에 딱히 일정이 없었고 고마운 마음에 간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당일이 되니 상황은 예상한 수준을 훨씬 넘어 아주아주 안 좋았다. 일단 몸이 점점 지쳐가는 게 느껴졌으니까. 벌써 마음만은 집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파묻고 자고 싶다. 그런데 어쩌지, 내가 무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초대받은 곳에 안 갈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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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3시간의 공연을 다 보고 나왔다. 원래 이대로라면 집에 가자고 해야겠지만 친구들은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고 하며 저녁을 함께 먹길 원했다. 그래, 아까 동물원에서는 계속 혼자 있었으니까 친구들이랑 저녁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조금만 버티면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갈 거야. 친구들이 생각하는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저녁을 먹자.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재채기와 피로감, 슬금슬금 새어 나오는 콧물은 이미 나에게 몇 번이고 적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참고, 참고, 버티고, 순간순간을 견뎠던 생일의 24시간이 지나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기숙사에 돌아와 그대로 녹초가 됐다. 이렇게 꽉 채워 보낸 생일은 없었다면서 ‘후회 없다’는 또 지긋지긋한 안심과 레퍼토리로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마음이 달랐다. 스스로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달려야 하지. 오늘이 진심으로 행복했니. 편안했니.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지금. 모든 일정들을 다 취소하고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분명 이렇게 또 아팠던 적이 몇 개월 전에 있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정을 소화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무리의 연속을 강행했던 9월. 몸이 이상해서 두 번이나 병원에 갔지만 바로 코로나 검사를 해주지 않았고, 세 번째 갔을 때 비로소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던 두 번째 확진의 날. 코로나 양성인 줄도 모르고 12시간 넘게 밖을 다니며 정신력 하나만 붙잡고 버텼던 날들. 주 단위, 일 단위, 시간 단위로 쉴 틈 없이 이동, 또 이동하며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었다.

 

그때는 그때만의 이유가 있었다고 정당화했는데, 돌아보니 아니다. 그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이 무리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이제 와 뼈저리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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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리를 해왔을까. 많은 목표를 이루겠다는 잔인한 정당화만 앞세워서 혹독하게 달려왔다. 그 목표들을 이루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이 과정들을 거치는 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돌이켜보니 목표와 욕심을 구별하는 데 미숙했다. 어느 선까지는 감당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면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포모 증후군(Fear of Missing Out)의 완전체가 지난날의 내가 아니었을까. 인생을 오늘만 사는 것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불같이 달려들었던 무모함은 용기의 범위를 어느덧 넘어서 버린 것 같다. 쓰리지만 인정해야 한다.

 

욕심의 크기를 낮추거나 욕심의 종류부터 철저히 구분해야겠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바탕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목표만을 잘 구별해야겠다. 더 이상 무리의 늪에서 쓰러지거나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삶이 좋은 인생이라고 믿어왔다. 이제는 그 비현실적인 생각을 말끔하게 접으려 한다. 하고 싶은 것을 지금 당장 못하더라도, 꾸준하게 우직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삶을 새롭게 시작해 보고 싶다.

 

새해는 1월 1일이 아니라, 만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지는 지금의 시기가 딱 적당한 것 같다. 내게는 이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지금이 새해다.

 

 

[신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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