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적지근한 늪 속에서 그들은 살아갈 뿐이었다 [도서/문학]

손창섭, 「비오는 날」, 「생활적」, 『잉여인간』, 민음사, 2005.
글 입력 2022.03.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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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든 시기가 도래했을 때 겪어야 할 우울에 대비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예상치 못한 우울은 우울 이전을 잊게 만들며, 일상을 집어삼켜 현재를 겨우 살게 한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는 기대는 소모적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철저히 개인의 몫으로 남았을 때, 무기력은 악순환된다.

 

현대문학사 안에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던 1950년대는 폐허만이 남은 시대였다. 해방에 적응할 새도,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전쟁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분단 체제와 이념의 대립이 자리 잡았다. 절망과 상처를 회복할 충분한 기간을 갖지 못한 채 계속되는 고통을 오롯이 감당해야 할 것은 개인이었다.

 

손창섭의 소설에서는 그 끝에 내몰린 개인들이 발견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조차 충족되어있지 않아 무기력에 휩싸이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위축된 그들은 비판의 목소리마저 잃어가 잠겨있는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전후 시기를 살아갔던 자신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소설에 투영한 것이었다. 자전적 특징을 지니는 그의 소설은 생존의 양태를 여실히 드러낸다.


전후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전후 문학에 만연했던 무기력은 현재와도 맞닿아있다. 현대인은 여전히 우울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손창섭의 소설 「비오는 날」(『문예』, 1953.11), 「생활적」(『현대공론』, 1954.11)을 함께 보는 까닭은 해당 시기 그의 소설이 살아나가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살아있음’ 자체를 주목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부 상황이 끝나지 않은 채로 서사가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인 두 작품에서는 어떠한 긍정도 내비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갔다. 그런 그들의 우울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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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 「비오는 날」, 「생활적」, 『잉여인간』, 민음사, 2005.

 

 

 

편재되어있는 우울, 「생활적」


 

그가 그려내는 사람들에게 우울은 편재되어있는 일상이다. 제목에서부터 나타나있듯 「생활적」의 인물들에게 우울이란 생활이다. 진부한 표현일지도 모른다며 묘사되는 주인공 동주의 심신은 마치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걸레 조각 같다. 이런 동주가 사는 곳은 방이 둘이고 두 세대가 들어 살고 있는 좁은 판잣집이다. 이들이 서식하는 공간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밀폐된 공간이며, 옆방에서 들려오는 식기 다루는 소리나 신음 소리만이 여과 없이 차오르는 곳이다.

 

 

주는 종내 어느 날 순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어째서 그렇게 밤낮 신음 소리를 지르니? 그렇게 죽어오게 아프냐?” 순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은 심심해서 못 견디겠는걸.” 그때부터 동주는 무겁고 암담한 순이의 신음 소리를 아껴주기로 한 것이다. 그 신음 소리는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르는 순이의 최선을 다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생활적」, pp.33~34)

 

 

소설 전반에 계속해서 깔리는 순이의 신음 소리는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름이 끼칠 만한 죽음을 생각게 하는 암담한 소리이다. 신음 소리를 들으며 물을 길어오는 것만이 동주의 일과이다. 순이는 쉬지 않고 신음 소리를 내고, 동주는 끊임없이 그 소리를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은 마치 젖은 옷처럼 전신에 감겨든다. 두어 달 전 포로수용소를 나와 전후의 현실을 그대로 겪고 차근차근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던 동주와 병명조차 모르고 허약해져 가는 순이는 죽음을 앞두고 하루하루를 견뎌간다는 점에서 동류의식을 가진다. 동주는 그런 순이의 신음 소리를 아껴주기로 한다.

 

이들과 집단·군중 사이에는 비탈길이 존재한다. 이는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의 소외를 보여준다. 생존 경쟁이 일어나는 샘터에서 어느 날 동주는 오물을 퍼다 넣은 것으로 의심받지만 그는 변명을 하기에도 지쳐있었다. 희망, 아니면 절망이나 공허라도 머리와 가슴속에 채워져 있어야 견딜 수 있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순이의 신음 소리에 간신히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그대로 하루를 또 보내는 것 뿐이었다. 이후 진실이 밝혀져 상황을 모면하긴 하지만,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동주에게 산다는 것은 전신을 내리누르는 무의미와 우울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의존적인 동주와 순이의 모습은 서로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확인해주는 생존의 근거가 된다.

  


순이는 그날 마침내 죽었다. … 동주가 물을 길어다 놓고 나서 도로 들어와 누우려고 하는데 순이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동주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하나, 둘, 셋 세기 시작했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배ㅡㄱ.”

[…]

인제는 순이가 아니다. 주검이었다. 동주는 주검에 키스를 보내는 것이었다. 주검 위에 무엇이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섧지도 않은데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자기는 분명히 지금도 살아 있다고 동주는 의식했다. 살아 있으니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생활적」, p.52)

 

 

순이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면 죽은 듯이 누워있던 동주는 눈을 뜨고 천천히 하나, 둘, 셋 하고 입 속으로 세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순이가 죽은 날, 한참을 센 “배ㅡㄱ”은 순이가 죽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마음이었다. “죽고 싶으냐”라는 물음에 긴장했던 순이도, 순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살아 있으니 죽을 수 있다’라는 확신이 단 하나의 ‘장래’라고 생각했던 동주도, 각자가 잠긴 자리에서 살아 있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던 것이다.


 

 

계속되는 장마, 「비오는 날」


 

1953년 발표된 「비오는 날」에서의 장마는 1954년 「생활적」 이전부터 내내 이어져 왔다. 이것은 무겁고 추적추적한 전후 시기의 풍조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비오는 날」의 제목 역시 보통의 언어로 언제든 존재할 수 있는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는 때에 따라 흘려보낼수도, 공기 중으로 훌훌 털어 버리며 맑은 하늘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작중 습도는 언제나 눅눅함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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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적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비오는 날」, p.9)

 


무덤 속 같은 이 방안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구해주는 것은 그래도 빗물 소리뿐이었다.(「비오는 날」, p.12)

 

 

차차 거세지는 빗소리와 도랑물 소리에 주검처럼 고요한 건물, 물탕에 젖어 꿀쩍거리는 신발 속, 동욱의 집 천장에서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빗물, 빗물이 넘은 양동이, 비가 와서 열 수 없던 원구의 가게,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바깥벽 판장 틈으로 스며든 빗물, 옷가지며 이부자리에까지 핀 곰팡이···, 그들의 삶 곳곳에는 빗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1.4 후퇴 때 어머니의 간청으로 여동생 동옥을 데리고 나와 사는 동욱 역시 전후의 여파를 참담하게 겪은 인물이다. 월남 이후 동욱은 미군 부대를 전전하며 초상화를 주문받고, 다리가 불편한 동옥은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간신히 꾸려나간다. 그리고 동욱의 친구인 원구 역시 피난지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내리는 비는 마치 「생활적」의 소음처럼 동욱과 동옥 남매에 대한 원구의 애정으로 얽힌다.

 

동욱의 집 또한 인가에서 뚝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 비가 줄기차게 내려 진득진득 걷기 힘들어진 비탈길을 원구는 동욱 남매를 만나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간다. 추적한 빗소리가 불러오는 어느 얄궂은 힘에 조종당하듯이 비가 오는 날이면 원구는 자주 동욱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굴속같이 침침한 동욱 남매의 집에서 원구는 유리 없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구약 성경』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떠올린다. 대홍수를 겪고 살아남은 노아네 가족에 동욱 남매를 떠올리는 것은 그들이 이 훼손된 현실 속에서도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상하게 원구는 정신이 펄쩍 들어,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고 대들듯한 격분을 마음속 한구석에 의식하면서도, 천근의 무게로 내리누르는 듯한 육체의 중량을 감당할 수 없어 그는 말없이 발길을 돌이켰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는 흥분한 소리가 까마득한 먼 곳에서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오한을 느끼며, 원구는 호박 덩굴 우거진 밭두둑 길을 앓고 난 사람 모양 허정거리는 다리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비오는 날」, p.18~19)

 

 

장마는 계속되고, 「생활적」과 같이 소설의 결말은 인물의 비참한 끝을 보여준다. 한 달 가까이의 장마로 인해 생활의 위협을 느낀 원구가 오랜만에 동욱 남매를 찾았을 때 그들은 이미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려 떠나고 없었다. 원구 역시 비에 젖은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스며드는 현실을 견디는 사이에 일어난 상실은, 여전히 자신은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감각으로 귀결된다.

 

 

 

서로에게 미적지근한 온도가 되어준다는 것



 

그러한 동옥이와 마주 앉아 자기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어떠한 포즈를 지속해야 하는가?(「비오는 날」, p.13)

 


원구는 동옥의 상처를 건드릴 만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비오는 날」, p.14)

 

 

좁디좁은 곳에 발 묶여있는 처지의 순이와 동옥, 그리고 그들의 곁을 꾸준히 찾는 동주와 원구. 이들의 물리적 거리는 비좁을 만큼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충분한 거리를 유지한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소모된 개인 간의 연대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함부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이러한 손창섭의 소설은 독자에게 어떤 희망도 해결의 실마리도 건네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언뜻 암울한 기분의 순환 안에만 놓이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살기 위한 안간힘이었으며, 동시에 살기 바라는 마음에 대한 역설이었다. 그의 작품 안에 만연해있는 무기력한 우울은 다른 이를 섣불리 동정하지 않는 조심스러움으로 이어진다.

 

 

동옥은 불을 끄고는 외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로 동욱은 불을 꺼야만 안심하고 잠을 들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동욱은 어둠만이 유일한 휴식이노라 했다. 낮에는 아무리 가만히 있었거나 누워 뒹굴어도 걸레처럼 전신에 배어 있는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비오는 날」, p.15)

 

 

지친 이들은 밝음의 뜨거운 온도에도 어둠의 차가운 온도에도 어느 곳에 쉬이 몸을 뉘이지 못한다. 손창섭의 작품에서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온도가 있다면 미지근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우울은 서로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 동시에 따뜻한 위로가 되지는 못하지만, 상대를 차갑게 끌어내리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미지근함을 지닌 인물들 역시 자칫하면 온도가 내려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로, 간신히 그 온도를 유지한다. 이것이 무기력이라는 안개 속에서 발견되는 그들만의 안간힘이다.

 

*

 

전후 문학에는 적극적이거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던 시대의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 각성과 계몽을 달려온 현대문학사의 흐름 안에서 이 시기의 문학은 우울을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 아닌 그대로 인정하고 소화할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

 

손창섭의 소설에서는 우울과 아픔의 원인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기분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안다. 이것은 그가 보여주는 미적지근한 늪이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하지 않은 채로, 그저 그는 늪에 잠겨있는 이들을 들여다본다. 그의 소설에서 살아나간다는 것에는 엄청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가장 필요한 위로이다. 그의 소설은 이런 존재를 기록했다. 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감내해야만 했던 개인들에게 이러한 삶이 그들의 탓과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대인은 여전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우울을 겪고 있다. 우리의 우울은 어떻게 기록될까. 현대에 와서도 우울의 이유는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우리들은 불확실성의 기로에 서 있다.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탓하지 않고, 상대를 차갑게 끌어내리지 않고 서로에게 묵묵히 미지근한 온도가 되어주는 것,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우울이 존재했음을 다시금 꺼내 보는 것은 과거가 우리에게 건네는 생존약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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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조명기, 「손창섭의 「生活的」에 나타난 전후의식」, 『어문학』 통권 제87호, p.675, 2005.

 

*본 글에서 표기한 『잉여인간』의 페이지 정보는 e-book 환경에서 읽은 것을 발췌한 것으로, 실물 책의 페이지 정보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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