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아침을 보러 갔다

글 입력 2024.02.0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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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고, 타인이 찍은 바다만 보면 갑갑했다. 여전히 이 대도시를 사랑하지만, 빌딩숲이 숨이 막혔고 푸른 것들이 보고 싶었다. 나도, 나도 트인 곳으로 갈래.


그렇게 짝꿍과 또 즉흥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차박이었다. 나름 한번 해봤다고 요령이 생긴 우리는 필요한 물건들만 알뜰하게 챙겨 나섰다. 같은 렌트 업체를 써서 그런지, 사장님이 차박용품을 서비스로 더 챙겨주셨다. 박살 난 인류애는 보통 이런 식으로 채워지곤 한다.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던 만큼 계획은 공백이 많았다. 짝꿍과 나는 극한의 P라 무계획이 더 익숙하고 어울리긴 하지만, 이번 여행은 유독 변수가 많은 상태에서 떠났달까. 우선 시장한 채 여행을 시작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평소에 찾지도 않던 던킨도너츠를 목적지로 설정했다.


그리고 10분 뒤 도착한 던킨도너츠에서 우리는 절망하고 말았다. 더 이상 치아바타를 팔지 않는다니. 대체 그럼 던킨도너츠는 무엇을 판단 말인가. 학창 시절 공항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치아바타를 먹곤 했었는데, 먼 길을 떠나려니 갑자기 생각나 찾아간 던킨도너츠였다. 짝꿍도 고등학생 때 독서실 앞 던킨에서 치아바타를 많이 사 먹었다고 하며 좋다고 했는데. 아쉬운 대로 우리는 다른 샌드위치 2개와 딸기 생크림 도넛, 아메리카노 2잔을 포장했다. 던킨도너츠는 도넛 가게가 맞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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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2NE1, 티아라 등 ‘그때 그 시절’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속초로 향했다. 기차로만 재빠르게 지나갔던 강원도의 산맥을 자그마한 자동차로 넘다 보니 처음 보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설경에 입이 절로 벌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산맥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해묵은 갈증이 내려가는 느낌.


첫 휴게소에서 나왔을 무렵부터 굵은 여우비가 계속 내렸다. 우산을 쓰기엔 햇빛이 아쉽고, 우산을 쓰지 않자니 눈을 똑바로 뜨기는 힘든 정도. 짝꿍과 나는 비 맞는 데에 딱히 겁이 없어 다행이었다. 변덕이 심한 빗속에 갑자기 나타난 무지개는 신기루 같기만 했다. 그리고 무지개 아래로 보이는 속초.

 

 

[크기변환]무지개.jpg

 

 

감자옹심이와 회국수를 깨끗하게 비운 우리는 대차게 주변에 있는 독립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웬걸. 독립서점이라기엔 너무 대형 서점의 느낌이 물씬 나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제일 유명한 곳이랬는데. 흥미가 가지 않는 것엔 전혀 시간을 쓰지 않는 우리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 왜, 그, 속초 스탬프 수첩이나 받으러 가자, 하며. 그리고 15분 걸어서 도착한 카페는 문이 열리지 않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중 우리는 관광객 내음을 풍기는 사람들이 전부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은근슬쩍 따라가 보았더니 조선소를 개조한 카페가 나왔다. 검색하면 1순위로 나오는 유명한 카페였지만 커피가 맛있다는 말이 없어서 전혀 올 생각이 없었던 이곳. 하긴,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항상 이런 식이지. 둘러보다, 네팔에서 수제로 만들었다는 오리 인형을 하나 사고 나왔다. 오리에 달린 '공정무역' 상표를 보니 정치외교학과를 준비하던 학창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샜다. 여행하는 맛이 났다. 커피는 사지 않았다.


빗줄기와 바람을 뚫고 도착한 사찰의 풍경은 감히 형용할 수 없다. 미술 시간 한국 수묵화에서나 본 듯한 모습이었다. 아, 이게 설산이구나. 따뜻한 섬에서 자란지라, 아무리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도 본 적 없는 그림이었다. 이래서 옛날 사람들이 시만 쓰면 산 이야기를 했구나, 순식간에 납득이 갔다. 이 정도면 인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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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시리고 볼이 에는 듯했으나 사찰을 떠나고 싶진 않았다. 추위에 손이 곱았고 카메라는 배터리가 순식간에 떨어졌지만, 한참을 구경했다. 같은 곳을 찍고 또 찍고, 같은 탄성을 반복하고. 더 높은 곳에서 보면 훨씬 멋질 것 같아 케이블카를 타러 갔는데 오늘은 운행종료란다.


에이, 하며 일주문 一柱門을 넘었다. 렌즈에 아무리 담아봤자 눈에 담는 것이 최고라, 부러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도, 아쉬운 마음에 영상에 소리를 담고 사진에 분위기를 담았다. 그래도, 내 기억에 남은 풍경이 제일인 듯하다.


박물관마저 동절기 운영시간은 지났다며 입장이 불가하다고 했다. 계절별로 운영시간이 다를 것은 생각도 못 한 우리 탓이니 별 수 있나, 하며 직접 원두를 볶는 카페를 찾아갔다. 커피는 독특하고 맛이 좋았지만 ‘인스타 감성 카페’ 특유의 정 없음은 성질에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입꼬리를 샐쭉거리며 나왔고, 잘못 든 길에서 바다를 만났다.

 

파도는 낮았고, 하늘은 색이 여렸고 옅었다. 보아하니 금방 질 노을이라, 해 지는 동안 커피를 비우고 가자고 했다. 난간에 기댔다가, 걷다가, 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시고. 어여쁜 사람과 함께 하면 즐겁지 않은 일이 없다. 편하고 즐거워서 웃음이 나기만 했다. 얘는 내 웃음이 좋다고 하는데, 내 웃음을 보는 이 애의 눈빛이 좋다고 매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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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향한 독립서점은 차를 세우고 나니 영업이 방금 끝났다고 해서, 우리는 또 입을 샐쭉하며 나왔다. 인터넷 검색 결과로는 아직 운영시간 한참 남았는데. 우리는 바깥에서 서점 내부를 기웃거리다 찝찝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로 돌아갔다. 조금은 투덜대며 시동을 걸었던 것 같다.


해가 지고 탄 대관람차는 밤바다가 시꺼멓기만 해서 앞에 앉은 짝꿍만 되려 잘 보였다. 대관람차는 바깥 구경을 하러 타는 것이 아닌가. 처음 타봐서 내가 모르는 건가. 야경이든 짝꿍이든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 뭐가 돋보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짝꿍은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나도 흔들릴까봐 무서워서 잠자코 앉아 있었다.


대게 튀김과 오징어 순대, 속초 맥주를 사고 차를 세웠다. 속초 맥주는 가격이 적혀있지 않았는데, 개당 7,500원이니 무작정 4개 사지 말고 다른 맥주를 섞어 사라는 편의점 사장님의 말씀이 참으로 감사했다. 이게, 흑맥주같이 조금 쓴데, 맛은 괜찮아. 온 김에 도전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찬 공기 속에서 찬물로 씻고 이부자리를 폈다. 맥주는 꽤 괜찮아서 순식간에 비웠고, 순대와 튀김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막힌 것 없이 트이기만 한 하늘, 일렁이는 물결 멀리 놓인 수평선과 낮은 건물들, 낡고 따뜻한 식당과 춥고 엉성한 가게. 그중 무엇이 보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떠나고 싶었던 건지 명확히 알 수가 없어서 지금도 아리송하다. 모험을 해보고 싶었던 건지, 일상이 싫지는 않은데, 비非일상을 겪은 지 너무 오래되었던 건지. 자꾸만 허기지는 속을 달랠 수가 없어 방방거리다 떠난 것이었는데, 이만치 안달 난 사람처럼 군 적은 처음이다. 앞으로도 이런 날이 잦을까, 싶다가도 잦으면 어떠냐, 싶기도 하고.


양치질하고 누운 자리는 정말이지, 천국이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창문에 서린 김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불 속은 따듯했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내일 뜨는 해가 기대되게 자꾸만 머릿속을 건드렸다. 사찰에 오래 머무른 탓에 햇빛 아래 놓인 것들은 많이 보지 못한 기분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도 같다. 괜히 놓친 것이 많은 기분. 여행에서 즐기지 못하고 놓친 게 많은 것만큼 아쉬울 수 없지 않은가.


공기가 너무 아늑해서 순식간에 잠이 들었고, 알람 소리에 깼을 때는 바깥이 어렴풋했다. 차가울 새벽 공기가 무서웠지만 굳이 ‘동해’로 온 목적은 사실 일출을 보는 것에 있었으니 바지런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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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내 원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날은 아무래도 야속하긴 하다. 이 악물고 일어난 노력이 허무하게 수평선 위로 해가 뜨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두꺼운 구름이 해 앞을 막고 있던 탓이다. 구름 뒤 햇빛이 천천히 높아지는 것을 보며 해가 올라오고 있음을 눈치챘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도 일출을 보러 오신 듯했는데, 구름 뒤가 밝아오는 것을 보고 스트레칭을 잠깐 하시더니 느긋하게 시내 쪽으로 걸어가셨다.


햇빛이 그 짙은 구름 위로 두둥실 올랐을 즈음, 우리는 설산에 햇빛이 비치는 광경을 보며 한참을 감탄하다, 그 모습을 보며 움직일 채비를 하고, 그러고도 조금 더 풍경에 먼눈을 팔았다. 어떻게든 더 기억에 담으려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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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는 멀리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길만 평소와 다르게 두어도 되는 법인데, 가끔은 모든 걸 제쳐두고 떠나는 것도 퍽 좋은 법인 듯하다. 매일 보는 새벽을 모르는 곳에서 어렴풋이 마주해보고, 창문 밖 둥실거리는 구름만 볼 게 아니라 수평선에서 빼꼼하는 아침 해도 보고, 마천루 위 달이 이쁘다며 사진만 찍을 것이 아니라 달빛만 흐드러진 동네에서 바람 소리에 겁도 내보고. 그렇게 가진 것 없이 걷다 보면 끝내 매일의 일상과 다시 닿는 것만 같다. 잠시 창문 열어 환기했으면 다시 창문 닫아 공기를 품는 것처럼, 속을 풀었으면 다시 일상으로, 원래의 온도로. 그렇게 살다가 또 답답해지면 옆 동네 마실 나가보고, 그러다가 또 훌쩍도 떠나보고. 그렇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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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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