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2022년 세상은 요지경 - 헬프 미 시스터 [도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도 복잡하다.
글 입력 2022.03.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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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뉴스를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이 있다. 단 몇 줄 기사로도 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벼랑 끝에 몰려있는지 생각하게 되는 삶. 그러나 그 생각은 찰나의 순간 반짝 켜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꺼져버린다. 남의 일이니까, 내 삶이 더 중요하니까.

 

이 소설은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려 애쓰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 간의 균열, 돈 때문에 상처도 덮어야 하는 현실,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플랫폼 노동,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억압, 서로가 가진 고정관념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목표를 낮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포기가 평화를 가져오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평화는 흰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아이들이 오색 풍선을 들고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평화가 아니라, 내전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마을에 서서 일몰을 바라보는 마음에 가까운 평화다. 수경은 그런 기이한 평화 속에서 다시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이 결심을 세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 p.17

수경은 그런 믿음이 생겨버렸다. 누가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자신은 영원히 구별할 수 없을 거라고. 그걸 구별하려는 마음이 싹트는 순간,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될 테니까. -p.18

여숙 씨는 주름진 손등과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언뜻 보아도 거칠거칠해 보였다. 물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여숙 씨는 종종 말하곤 했다.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봐라. 내 손이 이렇게 다 망가졌다,라고. - p.25
 


그래도 따뜻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서툴지만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하고, 전혀 달라 보였던 사람들이 연대감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경은 성폭력을 당할 뻔한 후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남성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다른 여성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둘은 성별을 떠나 함께 힘을 합쳐 이 사회의 소소한 인연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청년이 물었다. “또 때렸어요?”

청년의 목소리엔 확신이 묻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확신.

세 명의 기사는 ‘또 때린 남자’를 동시에 쏘아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점차 흐려지더니 욕설을 혼잣말처럼 뇌까리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 굶어죽고 싶니? 하지만 잘한 일은 잘한 거다.

 

- p.194-195

 

  

자신의 상처보다 돈이 급한 수경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정의해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보라와 서로 진심을 나눈다. 여숙은 천식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키오스크에서 원하는 메뉴를 주문한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소년이, 여유 있는 소설가와 프롤레타리아가, 엄마와 딸이, 사회에 저항하는 청춘과 사회에 순응하는 가장이 서로를 돕고 이해하려 한다.


 
우리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무언가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이런 일은 선례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 p.280

 


이렇게 중간중간 인간적인 감정과 희망이 솟아오른다. 사실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더군다나 다들 그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하루하루를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내고 있으니까. 조금씩 부족하고 조금씩 달라도, 그들은 가족이고 친구이고 이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마냥 이렇게 힘든 세상 속 따뜻함 한 조각을 이야기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차라리 이 소설은 절망적인 편에 가깝다. 플랫폼 노동에서 다른 플랫폼 노동으로, 방 한 칸 더 생긴 집이지만 반지하로. 얼핏 보기에 결말이 조금은 희망차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별로 나아진 건 없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아이들이다. 세상의 근본적인, 구조적인 문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들의 묵은 상처로 드러나는 순간이 어느 때보다도 잔인하다.


 
이런 일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정말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모르는 남자에게 사진을 파는 여중생을 겁도 없이 부르다니. 그 여중생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함부로 짐작하다니. (...) 쉽게 돈 벌려고 그런다고 생각했겠지. 너는 어른이니까 그 따위로 생각했겠지. 내가 진실을 말해줄 테니 잘 들어. 나는 각오하고 있는거야. 각오! 일이 틀어지면 다 죽여버리고 감옥 들어갈 각오하고 하는 거라고. 감옥! 각오! 감옥! 각오! 은지는 발악하며 남자를 걷어찼다.
 

- p.217

 

 

열다섯 살 은지가 성인 남성에게 말한다. 겁도 없이 어른이 여중생을 건드리냐고. 어른인 수경과 우재는 더는 세상을 날것의 마음으로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냐고 생각하며 서로를 의지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하루를 만들어가려 애쓴다. 그러나 아이들은 알고 있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쓰레기장을 파헤치며 사는 건 더 슬픈 일’(p.227)이라고. 그 어느 똑똑한 어른도 아닌 아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구조만 탓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때 서로가 주고받는 상처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복잡하다. 서로를 이해하기도 힘든데, 구조는 언제나 개인을 억누른다. 그 와중에도 사람 간의 연대는 피어난다.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사람에게서 희망을 얻는다. 구조 속에서 말라비틀어져 가고, 구조 속에서 먹고 살 돈을 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란 그렇게 복잡하다.

 

 
양천식은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가 당뇨와 고혈압으로 인한 합병증을 앓고 있거나, (...) 자식과 절연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양천식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해 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들은 양천식이 별다른 지병이 없고, 대출 이자를 내지 않는 것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으며, 어떻게 사위와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가 있느냐고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양천식은 웃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건강검진을 받은 지 한참 되어서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것일 뿐 어쩌면 자신의 몸에도 이미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대출이자도 대출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한테나 생겨나는 빛이고, 사위와 사이가 좋은 이유는 둘 다 돈을 벌고 있지 않아서였다.
 

- p.120

 

 

"(...) 밥상을 펴놓고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었어. 그걸 보고 약간 충격받았어."

"왜?"

"그 집이 너무 엉망인 집이었어. 외벽에 금이 죽죽 가 있고, 주변엔 쓰레기랑 개똥이 널려 있고. 나는 그때 그 사람들한테 고기 살 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그 집은 가난의 상징 같았거든.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어. 그런데 그게 깨진 거지. 저 집도 우리 집처럼 일주일에 한두 번은 고기를 구워 먹는 집이고, 부부는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하루를 잘 영위하는 가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어. 그때 가난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웠어. 고기가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가난한 게 아니다."

"우리 지금 고기 먹고 있는데, 가난하지 않다는 거야?" 

수경은 대답 대신 흐릿한 미소만 지었다.

 

- p.197

 

  

작가는 모두가 그 어려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무게, 무력감, 연대, 이해, 사랑, 증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 등. 간단한 감정에서부터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까지 그 모든 상황을 끈질기게 파고든다. 뉴스가 하지 못한 말을 소설은 할 수 있다. 그들도 사람이다. 아무리 커다란 구조 속의 부속품 같은 존재라도,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다들 저마다의 복잡한 삶 하나씩은 갖고 있다. 그 복잡한 삶은 서로 뒤엉켜있다. 그러한 우리는 항상 허우적대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끈질기게 파고든다. 그냥 택배 기사가 얼마나 힘든지만 나열하면 쉬웠을 텐데,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 부자는 어떻게 가난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지에 대해 불평만 늘어뒀다면 쉬웠을 텐데. 그냥 뜬구름 잡듯 구조만 탓하고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이 소설은 빛난다.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 보라. 우리의 삶은 모두 이 소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_표지(띠지).jpg

 

 

[정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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