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름다움일까, 비극일까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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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질릴 법도 하지만 또 들을 때마다 설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머릿속이 뒤죽박죽 새하얘지는 것 같아도 그저 느낌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이유 없이 그냥 좋다는 말이, 성립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책이 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너무 아름다워서.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몽환적인 그 느낌이 너무 뭔지 알 것 같아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잔잔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가게 하는 그런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책.
요시모토 바나나는 1964년생이며, 1988년 소설 ‘키친’으로 데뷔한 일본 현대 문학 작가이다. 아버지는 시인이고 언니는 만화가라고 한다. 그녀 소설의 키워드로 자주 언급되는 말은 ‘치유’이다. 국내 각종 문학상과 이탈리아의 문학상까지 받았으며, ‘바나나 현상’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그녀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녀의 소설 중 <<도마뱀>>(1993)이라는 책에 실린 <나선>이라는 단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영어와 한글 모두로 소설을 읽어봤다. 각각의 언어로 읽을 때마다 왜 이제야 이 작가를 알게 되었는지 후회할 만큼 좋았던 작품이었다. 아니,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녀는 붉은 바나나꽃을 좋아하여 필명을 '바나나'로 지었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느낌
나는 그날 심한 숙취로 오후 내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55면)
소설에서 첫 문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소설의 첫 문장 중 이 문장만큼 괴로우면서 아름다운 문장이 있을까. 사랑에 빠진 순간은 너무도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한 일만 계속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어딘가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너무도 복잡해서 매일매일 보장된 행복만 가득하다면 더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숙취처럼 메스껍고 어지러운 것이 사랑이다. 알면서도 잊지 못한 채 다시 저녁에 술을 찾는 것도, 다음날 숙취에 괴로워하면서도 전날의 흐릿한 추억을 사랑하는 존재도 바로 사람이다. 작가는 이 한 문장 속에 사랑을 담고 있다.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일상에 변수를 가져다주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이름을 숙취로 부르고 있다.
첫 문장 뒤에 이어지는 전개도 몹시 낭만적이다. 우선 왜 이 소설이 매력적인가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2문단을 예시로 조금 자세히 뜯어보자.
나는 문장을 써서 살아간다.
실은 그날도 어떤 사진작가가 찍은 풍경 사진에 걸맞는 문장을 서둘러서 써야 했지만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그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를 담은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55면)
얼핏 보기에 굉장히 평범해 보인다. 숙취로 하루 종일 고생하고 있는 ‘나’가 그날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 전혀 평범하지 않다. 이 간단하면서도 일상적인 상황 속에 사랑의 발단이 숨어있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한다. 소설의 첫 문장과 연결해 볼 때, 우리가 알 수 없는 소설 밖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언제 누구와 마셨는지 모를 ‘나’의 어젯밤 술자리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숙취니까.
그런데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랑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고. 너무나 복잡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일상의 모든 신경이 한곳으로 쏠려버려 결국 다른 일에는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소설 속 ‘나’가 겪는 숙취와 그로 인한 일상의 차질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는 삶 전체를 뒤흔들어버린다. 그러한 사랑의 소용돌이가 너무나 매끈한 한 문단으로 시작되고 있다.
3문단, 4문단, 5문단, 6문단...도 마찬가지이다. 계속해서 ‘나’의 평범한 일상과 생각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일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으며, 침대에서 보는 하늘이 너무나 투명했고, 옆집 아이가 연습하는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조차 하늘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옆집 아이가 연습하고 있는 서투르기 짝이 없는 바이올린 소리가 나를 감동시켰다. 마음속에 비친 파란 하늘 가득히 마치 스며들기라도 할 듯이 음색이 흘러갔다. 서투르면 서투를수록, 어설프면 어설플수록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선명한 파랑과 어울렸다. (56면, 6문단)
그러나 사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란 “항상 자신의 머릿속을 엿보인 듯한 느낌”(55면, 3문단)이 들며, “정말로 끝없이 투명해서 어쩐지 뭔가에 속고 있는 듯한 느낌”(56면, 4문단)이 든다. “서투르기 짝이 없는 바이올린 소리가 나를 감동”(56면, 5문단) 시키듯, 서투름 그 자체도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는 “잘 아는 어떤 여성의 속눈썹”(56면, 6문단)이 떠오르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은 단번에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아무 말 하듯이 지껄여도 그 안에는 사랑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아름답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설은 모르는 척한다. 곳곳에 사랑을 숨겨두고는 그저 유쾌한 척, 가벼운 척 일상으로 위장한 사랑의 전개를 제시하고 있으니 그만 퐁당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고 돌아도 똑같은 달빛이 비치는 쓸쓸한 밤”(57면)에도 사랑이 숨어있는 소설 속, 이미 문 닫은 가게에서 ‘나’는 그녀를 만난다. ‘나’가 그녀를 만나기 직전, 독자들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털어놓는 장면을 보라.
그런 식으로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사라진 듯한 것을 좋아한다.
밤과 낮, 그릇 위의 소스, 카페에까지 흘러들어온 잡화들.
그건 그녀를 사랑한 탓에 받은 영향이다. 그녀는 초저녁 달과 닮았다.
옅은 파랑의 점차적인 변화에 이제라도 곧 사라질 듯한 그 흰빛. (58면)
똑같은 달빛과 쓸쓸한 밤은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달이 되고, 숙취로 괴로워하며 바라보았던 투명한 하늘이 그녀와 맞닿는다. ‘나’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경계가 사라져버린다. 사랑의 낭만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걸까.
저물어가는 사랑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은 이제 막 시작하는 풋풋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저물어가는 사랑에 가깝다. ‘나’는 말한 적이 있다. “알게 되는 순간은 항상 두렵다.”(56면)라고. ‘나’가 그녀를 사랑함에도 만나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그 두려움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느끼고 있지만, 알게 되는 순간을 피하고 싶어서.
그녀는 '나'에게 필요 없는 기억을 모두 씻어준다는 강좌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녀가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와의 일을 전부 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잊고 싶어. (62면)
이렇게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둘은 마주 보며 웃고 있지만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과거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미 둘의 대화에서 그 추억은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드러난다. “별이 아름다웠어. ..... 그때가 그리워.” (63면) 이렇게 말하는 둘의 관계는 이미 좋았던 시절이 ‘그리울’만큼 멀어져있다.
너무 사랑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 잊고 싶다는 마음을 잊지 않고 싶어 하는 관계. 그 두 사람의 관계는 과연 “상대방을 서로 따라 하며 영원히 이어지는 나선(螺旋)” (68면) 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감아 올라가는 영원 동안 두 사람은 찰나의 순간에라도 닿을 수 있는 것인지. 그녀는 ‘나’를 잊어버리게 될까. 둘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렸을 때에는 '사랑해서 헤어진다'라는 말만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은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관계니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단지 세상에 남아있는 두 사람만의 비밀일 뿐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비밀을 품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두 사람' 중 '단 두 명'을 그려내고 있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의 주위를 맴돌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 "내 사랑은 네 사랑과 조금 달라."(67면)라고 말하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면서도 따뜻할까.
소설 밖의 결말은 독자마다 다르게 상상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결말만을 놓고 봤을 때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찰나의 불꽃놀이가 결국은 끝나버리듯이, 이들의 사랑은 이미 과거형이 되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닿을 수 없어도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비극이 아닐 수 있을까. 잊어버려도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비극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사랑이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고 싶다.
이 소설은 '아름다움 중의 비극'이다. 분명 유쾌하지만은 않은 결말이다. 하지만 비극보다 더 큰, 비극을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소설 속 두 남녀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설령 잊어버린다고 해도, 잊지 못한다고 해도, 둘의 사랑이 오로지 '허무'가 되어버린다고 믿지는 않는다.
순간의 폭발이 잠들어 있던 거리를 깨우는 것처럼, 이들의 사랑은 아름다움의 파편이 되어 독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와 '그녀'의 마 속에 산산이 박힐 것이다. 별은 죽어갈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는 법.
누구든 직접 이 소설을 읽으며 놀라우면서도 환상적인 전개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해 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전개 속에 숨어있는 사랑에 대한 복잡한 질문들도. 한 문장 한 문장에 사랑이 숨어있다. 그 사랑이 비극일지, 아름다움일지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참고 도서 : 요시모토 바나나, <<도마뱀>>, 김옥히 옮김, 민음사, 1999. (필자는 2011 2판 1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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