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처음의 비망록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장면들' 2편 [도서/문학]

손석희 앵커의 원칙이 증명하는 전통 언론의 가치
글 입력 2022.01.3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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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은 해당 링크를 통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보도정신(鼎新), 시대정신



 

“내가 내세운 보도의 네가지 원칙, 즉 ‘사실, 공정, 균형, 품위’ 중의 마지막 것, ‘품위’에 맞는가를 떠올려보니 답이 잘 나오질 않았다.” 『장면들』, 2021, 창비, 124면.

 

“그렇게 해서 새해 벽두부터 다시 숨 가쁜 ‘게이트 정국’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부터 우리 보도는 잠시 동안의 논란 속으로 들어갔다. ‘기자가 참여자냐 관찰자냐’ 하는 오래된 논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장면들』, 2021, 창비, 129면.

 

“때로는 드라마가, 예능이, 교양이 뉴스가 이룩한 저널리즘보다 훨씬 강렬하게 저널리즘을 실천해왔으며 그들의 성취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장면들』, 2021, 창비, 11면.

 

“저널리즘을 실행하는 도구의 변화가 (신문에서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으로) 있어왔을 뿐, 저널리즘의 정신을 말하는 데에 페니프레스 시대의 구조와 디지털 시대의 구조가 다를 리 없다. 『장면들』, 2021, 창비, 360면.

 

 

‘원래 그렇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해보자. 짐작하건대 동네 어귀에서 들리는 대거리의 절반은 사라질 것이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세부적인 설명이나 사사로운 감정 없이 일에 있어 일반적인 질서를 준수하겠다는 의지도 대화의 종결을 위해 그 한 마디로 함축될 때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원래와 원칙이 혼용되는 것이다. 원칙은 어쩌면 몇 마디로 갈음되어야 할 견고함이 있어야 한다. ‘원칙이란 그러하다’라는 한 마디로 숱한 대답이 대체되어도 마냥 경시할 수만은 없는 내구성과 원래 그렇다는 고압적인 정형과는 달리 상황에 따라 모습의 변용이 허용될 수 있는 약간의 유연성이 원칙에는 담겨 있다. 언론인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사실, 이해관계 속에서의 공정,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는 균형, 무엇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지에 대한 품위가 손 앵커가 견지하는 원칙이다.

 

원칙은 본디 천연의 산물이 아니다. 처음을 따져야 하는 원래보다 원칙이 가공의 영역과 더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절대적 순응을 강요하는 건 참으로 안 될 일이다. 문제는 저마다의 원칙이 충돌함을 넘어 소모적인 쟁투가 발생하거나 국민의 알 권리가 명백히 침해받을 때다. 기자가 참여자냐 관찰자냐와 같은 논란은 르포르타주(Reportage)가 보도기사와 기록문학 중 무엇에 가까운지를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상대적이다. 종국적으로 무엇이 변칙이냐를 묻는 쟁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원칙이 언론을 형성하는 필요조건을 거스르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당위적으로 사실이 충분조건이 된다는 건 참으로 안 될 일이다. 품위라는 원칙과의 연쇄를 참작한다면 더욱 그렇다. 필요에 의한 집단이 심층 보도를 일응의 추정으로 전락시키거나 언론에 폐단이 드리운다 해도 성역으로 간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필요의 범위를 논하는 실익도 있을 것이다.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되는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합헌적 한도를 놓고 다툼이 있듯이 알려야 더욱 마땅한, 언론에서의 공익은 몹시 다양한 생활상 가운데 확언하기 어려운 시대정신만큼이나 ‘현실은 버라이어티하고 논쟁은 앙상하다’는 손 앵커의 첨언을 차용하여 ‘현실은 버라이어티하니 논쟁은 앙상하지 않아야 한다’ 정도로 가다듬으면 될까. 안정성을 추구하면서도 보편에 기대하지 않는 역설이 당대의 일부라 할지라도 기성 언론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사회의 표상을 나타내는 여러 장르가 언론의 일부로 인식되는 추세를 무시하지 못하겠다. 손 앵커가 ‘필요 이상의 엄숙주의는 피하고’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이 대중문화’임을 인정하며 앵커브리핑으로써 ‘뉴스의 인문학적 확장을 시도함으로써 경직된 시사보도에 활로를’ 연 기저에는 가변의 불가항력이 있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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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시간들과 변하고 있는 시간들이 삶을 메운다.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해야 한다면서도 담백하게 사유하려면 기준의 가짓수를 줄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혹자들이 시류에 편승하는 태도를 보면서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을 무렵 날이 갈수록 최선을 다한 오늘에 나는 냉소적이었다. 올곧은 정의나 공명정대가 개인의 신념에 그치는 이상에 불과하다며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 만큼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보다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단 하나의 진실이 맞는지 진위 여부에 깊은 불신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파주의적 풍조가 강해지고 음지가 넓어질수록 창언정론(昌言正論)을 향한 시청자들의 갈급은 심해질 것이다.

 

배타성은 정보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유효하다. 따라서 뉴미디어와 달리 일방향적이며 전달 속도가 느리고 방송 전파를 타기 전까지 독점적이라는 평을 받는 전통적인 언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 같지만 결코 다르지 않으므로. 단적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대가 없는 정보 공개를 원치 않는 블로거(Blogger)는 수혜의 객체를 몇 가지의 방식으로 선별한다. 자신만큼이나 양질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이는 타 블로거와 이웃을 맺어 형성한 공유 집단 또는 자신의 게시글을 홍보해주고 이를 댓글로 인증하는 사람에 한하여 정보를 전해주는 방법 등이다. 철저히 사익과 관련된 예시라 할지라도 종국적으로 획득한 정보의 질을 판단하는 표준의 시작점은 정론이다. 왜곡의 여지가 없는 비타협적 성질만을 갖고 있노라면 오늘의 대중매체는 진척할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새해다. 팬데믹으로 간소화된 구정 풍경이 이제는 낯설지만도 않다. 종잡을 수 없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예년과 같이 계획을 세우거나 덕담을 나누는 데에 간절한 마음이 커지면서도 여러 소망들을 인사치레로 여겨야 한 해를 보낸 뒤 실의에 빠지지 않을 것 같은 의중도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다. 일간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일이 공연하다 싶을 만큼 다사다난하게 끝나 소란스레 시작하는 해의 어귀이다. 당장 연휴가 무색할 만큼 어느 곳에선 비통의 목소리가 일고 폐부에서부터 이는 고통에서 고투하고 있을 테니 언론은 깨어 있어야 한다. 긍정과 부정이 실로 비등해진 한 해를 보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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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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