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두 갈래로 나뉜 인류, 공존과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하다 - 연극 '태양'

글 입력 2021.10.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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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태양>의 배경은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 인구가 격감한 가상의 공간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바이러스 감염자 중 항체를 가지게 된 자들이 면역력이나 신진대사 면에서 월등하게 변이되며 신인류로 부상한다. 단, 그들은 자외선에 치명적으로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들은 이것이 진화의 과도기라 주장하며 자신들을 밤의 인간 '녹스'라고 부른다. 녹스의 인구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정치 경제의 중심은 서서히 녹스에게로 옮겨갔다.


바이러스 항체를 가지지 못한 구인류들은 골동품을 뜻하는 '큐리오'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풍요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날 구인류가 모여 사는 작은 집락촌 '나가노 8구'에서 녹스 한 명이 살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해당 마을은 녹스 자치구로부터 10년 간 경제 봉쇄를 당하게 된다. 이제는 남은 주민이 스무 명 남짓이 된 이 마을에서, 봉쇄가 풀린 후 큐리오와 녹스의 왕래는 다시 시작된다.

 

 


대립



인류가 둘로 갈라진 채 서로 다른 수준의 삶을 영위한다면, 갈등과 대립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다. 녹스와 큐리오도 서로를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여기며 경계한다.


이는 연극 <태양>에서 무대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의 조명 빛을 통해 일차적으로 표현된다. 녹스 자치구와 큐리오 집락촌 사이의 이 경계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다. 녹스의 검문 절차는 느슨한 반면 큐리오가 녹스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녹스와 큐리오 중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대립은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을 통해 극명하게 나타난다. 10년 전 나가노 8구에서 녹스 한 명을 살해하고 도망간 카츠야, 녹스를 경계하며 큐리오가 모여 사는 사회로 떠나기를 꿈꾸는 유, 큐리오에 대한 무시를 전제로 한 녹스들의 대화.

 

 


공존



공존의 씨앗은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녹스 후지타와 나가노 8구의 주민인 큐리오 데츠히코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녹스였던 후지타는 큐리오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큐리오에게 적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데츠히코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녹스가 되고 싶어 한다. 후지타와 데츠히코는 점차 친구가 된다.


하지만 '녹스와 큐리오의 극명한 대립 속 피어나는 두 청년의 우정'만으로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순한 극본은 아니다. 10년 만에 돌아온 카츠야가 녹스에 대한 증오심으로 후지타에게 수갑을 채우고 기둥에 연결해서 태양이 뜨면 그대로 타 죽도록 해놓았을 때, 데츠히코와 준코는 어떻게든 연결된 쇠사슬을 끊고 후지타를 살리려고 한다. 아주 긴박한 상황 속에서, 후지타와 모르는 사이인 준코가 보이는 행동들과 절박한 표정은 그저 같은 인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려는 본능의 투영이다. 서로의 다름과 대립 상황을 신경쓰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 밖에도 태양을 마주할 수 있는 큐리오들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 뛰어나다는 대화를 나누는 녹스들, 차별주의자인 자신을 인정하고 변화하고자 큐리오 아이를 입양하는 녹스 세이지의 모습 역시 대립의 분위기를 허문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녹스인 요지가 큐리오였을 적 친구였던 소이치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준 사고의 변화이다. 녹스가 되어 아직도 젊은 모습인 요지는 자신의 친구 소이치가 늙어버린 모습을 보며 신기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는 녹스가 태양을 등지고 살아야만 하고, 생식 능력에 문제가 있어 계속 큐리오 아이를 데려와 녹스로 만드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는 상황을 꼬집는다. 그는 녹스임에도 태양을 마주하고 싶어 한다. 설령 죽음에 이를 지라도. 극의 결말에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더 인간다운 모습, 즉 큐리오처럼 떠오르는 태양빛을 그대로 받으며 삶을 마무리한다. 큐리오 친구 소이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말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요지에게 인간다움이란 태양이 뜨는 낮을 온 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자유였을 것이다. 후지타도 녹스가 되고 싶어하는 데츠히코에게 태양을 볼 수 있는 기쁨을 계속 누리라고 말한다. 녹스는 사회적 지위와 건강한 신체를 가졌지만 밤에만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큐리오는 낮과 밤 모두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빠르게 노화하고 쉽게 병이 들며 사회적 지위도 갖지 못했다. 이런 특징들을 통해 연극 <태양>에서는 인간에게서 태양과 들끓는 마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큐리오인 데츠히코는 그들이 녹스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 데츠히코는 학교에 다니고 싶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녹스가 되고 싶어한다. 적어도 지금의 데츠히코에게는 태양을 보는 자유보다 원하는 것을 배우는 자유가 더 중요한 것이다.


연극 <태양>에서는 다양한 가치가 등장하게 된다. 자유, 도덕성, 감정의 유무와 표현, 예술, 월등한 정신 능력, 가족애, 생산성 등. 녹스와 큐리오는 외적인 연출로는 각각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 캐릭터 하나하나가 우선시 하는 가치는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각기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나는 녹스들이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합리적인 사고만 하는 녹스는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는 않겠지만 인간다운 행복한 감정들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큐리오는 다양한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녹스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감정에 휩싸여서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녹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서 후지타를 무작정 태양빛에 태워 죽이려고 했던 카츠야처럼.


이처럼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이 가진 가치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우린 모두 인간이잖아." 라는 후지타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 모두는 많은 부분에서 각자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같은 인간으로서 타인과 공존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게 인간다운 모습인 것이 아닐까. 녹스와 큐리오는 시력이 달라서 볼 수 있는 별의 갯수는 다르지만, 다른 풍경의 밤하늘을 보면서도 똑같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언제나 공감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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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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