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에 걸렸습니다

마감일을 지키지 못한 에디터의 글쓰기 비하인드
글 입력 2021.09.0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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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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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 이상 쓰기 싫었던 2021년의 어느 날, 친구들과의 대화

 


말 그대로다.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에 걸렸다.

 

때는 바야흐로 세 달 전인 6월, 근로계약서에 묶인 노동자의 몸이 되었다. 분명 그렇게 힘든 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주 5일 근로에 내던져진 몸은 삐걱거렸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디멘터(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마법 생물, 입맞춤을 통해 그 대상의 영혼을 흡수할 수 있다.)의 입맞춤을 받은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과거 숱한 사무보조 알바를 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꿀 알바'였던 거다. 내 몫의 밥값을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몸과 마음에 온 앤 오프 스위치가 생성됐다. 오늘 계속 일했으니까, 남은 시간에는 정신력 소모가 없는 걸 해야지. 본격적인 오프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음식을 잔뜩 곁들인) 운동, 잠, 미디어에 절어있기(=덕질) 정도다. 이 몹쓸 보상 심리는 생각보다 더 괘씸한 놈이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간신히 질문을 던져도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하다. 보통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쓰는데, 이는 "왜 좋아해?"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력 소모를 하기 싫으니 간신히 "이거 좋다!"라고 느껴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생각의 레이스가 "(보통 비속어가 섞인) 이거 재밌다. 이거 좋다. 이거 죽인다. 흑흑." 정도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끄적여보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좀 써보려고 빈 화면에 집적이다가 조용히 삭제한 글이 몇 개인지.

 

무슨 글을 대체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좀처럼 다시 읽어보지 않는 예전 글들을 다시 찾아봤다.

 

 

 

입 다물면 죽는 병 (feat.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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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얘 진짜 더럽게 말 많다." 예전 글을 찾아보고 딱 들었던 생각이다. 어찌나 구구절절인지 조금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냥 문장으로는 성이 안 찼던지 여기저기 난무하는 중괄호에 tmi. 문장 끝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아우성이 일었다. 아무래도 지금과는 정반대로, '입 다물면 죽는 병'에 걸렸던 게 아닐까 싶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좋아!"라는 마음이 잘 드러나는 글이었다.

 

읽다 보니 당시 글을 쓰던 순간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캄캄한 밤부터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한큐에 쓰곤 했다. 뇌가 멍해지고 눈이 건조해져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쓰다 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단편적인 이유들을 늘어놓고, 또 그 조각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연결하는 작업은 조금 진 빠지지만 고양감이 엄청났다. 중구난방으로 널브러져 있던 취향을 마침내 아카이빙한 기분이랄까.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을 심하게 앓는 동안 문화생활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공연도 보러 갔었고, 영화관에도 갔었고, 책도 꾸준히 사 읽었고, OTT 구독 개수가 5개에 이르게 되면서 드라마에는 말 그대로 절어 있었다. (7-8월 두 달 동안 무려 9개의 드라마 시리즈를 깨부쉈다.) 그간 즐겼던 모든 콘텐츠들이 별로였던 것도 아니다. 설령 별로였다고 한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발굴하면 되지 않나. 근데 참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입 다물면 죽는 병에 걸려 있었던 내가 부러워졌다. 물론 그때도 글을 라면에 밥 말아먹듯 후루록 쓴 건 아니었지만, (분명 과거에도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쨌든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럴 수가 없을까.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과 입 다물면 죽는 병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입 다물면 죽는 병을 고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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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쉬지 않고 입(손)을 놀리게 된 날이 있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너무 좋았고, 그래서 해당 드라마를 추천해준 친구한테 곧바로 연락했다. 친구와 밤새 카톡으로 떠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실컷 늘어놓다 보니 세줄 이상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용기가 샘솟았다. 한 마디로 입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이 증상은 간헐적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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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날, 인스타그램 스토리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지만 집중하고 앉아있을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다. 매일 조금씩 쓰는 성실한 글쓰기는 확신의 벼락치기 성향을 가진 나와 영 맞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보통 생각나는 것들을 여기저기 널브러뜨려 놓고 조립하는데(도입부를 쓰다가 마지막 부분을 쓰다가 그냥 단어들만 몇 개 떨어뜨려놓기도 한다.), 한 순간이라도 흐름을 놓치면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다. 그럼 다시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이 도지는 거다.

 

매일 제자리걸음인 글을 마주하다 보니 처음의 다짐은 점점 작아져만 갔고, 시작한 글을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밤을 불태우기엔 내일의 업무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고, 주말에는 (평일 노동에 대한) 온갖 달큼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친구와 밤새 떠들었던 '좋아하는 이유'가 머릿속에서 동동 떠다녔다. "세상 사람들아! 이거 너무 좋은데, 나만 알기 아까우니 제발 알아달라!"라고 난리부르스를 치고 싶었다.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는 가운데, 놀랍게도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증상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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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날이 아니라면, 새벽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근무 시작에 재택이어서 가능한 대처였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무드등과 초를 켜놓은 새벽의 내 방은 과몰입하기 딱 좋은 환경을 제공했고, 오랜만에 글을 완성했다.



 

비록 완치는 아니지만


 

사실 '세줄 이상 쓰면 죽는 병'은 완치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찌어찌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증상'이 힘 좀 썼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미지수다. 이 고약한 병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 에디터로서의 사망 선고를 받는 날이 아닐까?

 

스스로의 상태(나태함과 의지박약의 콜라보)를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병의 완치는 바라지도 않지만, 부디 내게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증상'이 자주 나타나길 바란다. 지금으로선 이게 유일한 치료법인 것 같다. 좋아하는 것들과 그 이유로 가득 찬 세상은 뭘 하든 간에 커다란 동력이 될 거니까 말이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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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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