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동자들의 아픔에 공감했던 사람, 전태일 [사람]

글 입력 2021.08.3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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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어디선가 들어본,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노동운동으로 잘 알려진 청년 전태일은 1948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크기변환]전태일 모습.jpg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가난했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것은 그에겐 사치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거나 공동으로 만들어진 천막촌에 사는 등 사는 곳을 옮겨 다니며 고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기보다는 나빠졌다. 전태일은 일자리가 필요했고, 따라서 고등학교에 한참 다녀야 할 열일곱 살에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청계천 평화시장에 취직하게 된다. 그가 사회에 나와 처음 얻은 직함은 ‘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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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여공 시다들의 모습

 

 

시다는 재단사 옆에서 보조를 돕는 역할이다. 당시 시다의 근무 환경은 처참하고 열악했다. 대부분의 시다들은 열두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 청소년으로, 전태일과 같이 여러 환경에 쫓겨 이곳에 정착한 이들이었다.


더욱 문제였던 점은 열악한 처우였다. 이들은 빛이 잘 들지 않고, 먼지가 날리는 봉제공장에서 하루 15시간을 일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작업 환경에서 시다들은 자연히 여러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 전태일의 생전 말

 

 

전태일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를 안쓰러워할 줄 아는 이였다. 그는 평화시장이 위치한 동대문에서 집인 도봉산까지 약 12.5km를 3시간 동안 걸어서 퇴근하며 교통비를 아꼈고, 그것으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서 나눠주었다. 당시에는 매일 야간통행 금지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시간에 걸어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궁금히 여긴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는 그를 암묵적으로 그냥 통과 시켜 줄 정도였다.


열정적이었던 청년 전태일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교섭을 진행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67년, 노력 끝에 재단 보조(시다)를 넘어 재단사가 되었다.


그러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린 시다들을 돕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 날,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당시 근로기준법은 [- 근로시간은 휴식 시간을 제하고 1일 8시간, 1주일에 최대 60시간을 넘지 않는다. / -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등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 중 어떠한 조항도 지켜지고 있지 않음을 인지한 것이다.

 


[크기변환]근기법 위반 실태 조사표.jpg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을 묻고자 전태일이 만든 설문지

 

 

법적 체계, 근본적인 사회의 체계에 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한 전태일은 이후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길로 접어든다.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거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평화시장의 노동운동 실태를 토로하는 편지를 작성해 보내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업체를 만들기 위해 여러 곳에 자금 마련을 위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금 조달에 실패하는 등 여러 어려움은 그에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절실했던 청년 전태일은 1970년,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한다. 당연하게도 이 시위는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러자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분신 항거했다. 그가 화형식을 마음먹었을 때부터 분신 항거할 생각이 있었는지, 우발적인 행동인지, 그것은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단지 우리는 그가 화형식 직전 그의 어머니를 뵙고 갔으며, 평소 친구들에게 ‘내가 죽어야 바뀔 것 같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는 정황으로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분신 항거를 통해 사회가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태일이 원하던 대중의 관심은 이 항거 이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그의 죽음을 통해 사회 각계각층, 특히 대학교의 학생들이나 종교계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집회와 시위를 이어나가는 등 활발한 활동이 펼쳐졌다.

 

 

[크기변환]평화시장 동상.jpg

평화시장에 위치한 전태일의 동상

 

 

우리는 왜 한 사람의 죽음에 이토록 집착하고, 기념관을 세우고, 책으로 전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죽음이 한 명의 단순한 죽음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청계피복노조의 고문으로 활동했고,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노동운동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41년간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삶을 지내다 2011년 세상을 떠났다.


또, 전태일의 분신 항거로 촉발된 노동운동의 성장과 연대는 동시대까지도 이어지는 흐름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주52시간제나 최저임금 등,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사회에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는 일은 유의미할 것이다.

 

 

 

조소연 Nametag.jpg

 

 

[조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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