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화처럼 숨을 쉬는 [영화]

영화 <고래사냥>(1984)
글 입력 2021.08.1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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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980년대는 풍요와 억압, 올림픽과 고문치사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의 시대였다. 경제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으나, 유신과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70년대의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대신 지난 정권이 어떻게 붕괴했는지 지켜본 80년대의 정치 권력은 일종의 회유책으로 전임 정부의 여러 제한을 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디어 분야에서는 영화, 스포츠, 성 문화를 장려하는 이른바 3S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이것이 언론 및 문화계 전반에 대한 검열의 완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TV에서는 컬러 방송이 시작되는 동시에 언론 통폐합이 이루어졌고, 영화 산업에서는 선정성과 폭력성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어 성인 영화와 스포츠 영화가 성장했지만, 정치적 검열은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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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환경 속에서도 주류 영화들과 다른 결을 지닌 작품들은 꾸준히 등장했다. 이장호와 배창호 감독을 시작으로 장선우, 박광수, 박종원 등은 검열의 틈새를 비집고 노동이나 계급, 빈곤 문제 등 당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제작했고, 이는 소위 ‘코리안 뉴웨이브’로 그 영화사적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코리안 뉴웨이브로 분류되는 모든 감독이 정치/사회적 이슈에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배창호 감독의 경우 특유의 서정성과 낭만성 때문에 당대의 이슈를 그리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 왔다. 배창호 감독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그가 소위 ‘낭만적 리얼리스트’로서 80년대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확장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감독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은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다루는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명확한 논의와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70~80년대 영화들은 대부분 계급과 정치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거시적 권력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배창호의 영화는 그보다 더 미시적이고 근대적인 차원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초점을 둔다. 즉 배창호 감독은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것에 소홀했다기보다 사회문제의 기원을 당대의 감독들과 다른 차원에서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의 주도로 복원을 거쳐 블루레이로 출시된 그의 대표작 <고래사냥>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대의 스타들이 출연했던 <고래사냥>은 훌륭한 로드무비이자 84년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었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이 영화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어쩌면 배창호가 포착한 한국의 모더니티와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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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사냥>은 철학과 대학생 병태가 거지인 민우를 만나 여인촌에서 강제로 일하는 춘자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여인촌에서 탈출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병태는 학벌도 좋고 집안 형편도 부유하지만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방황하는 당대의 젊은 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감벤의 어법을 빌리자면 사회적으로 ‘식별역'에 속하는 병태는 무기력하게 방황하던 중 민우의 손에 이끌려 여인촌에 가고, 그곳에서 정상적인 사회의 질서에서 배제된 사람들, 즉 ‘비식별역’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비식별역은 정치 권력의 작용 대상이라기보다는 미시적인 생명 권력의 작용 대상이다. 70~80년대 한국의 정치 권력은 권력에 저항하는 개인을 폭력으로 배제했지만, 생명 권력이 비식별역을 배제하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비정규직, 거지, 장애인, 여인촌 여성 등으로 대표되는 비식별역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로, 사회에 포함되는 동시에 배제되면서 구조적 질서를 유지하고 권력을 재생산한다.

  

그들의 존재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식별역이 비식별역의 존재를 통해서 그 정상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작중의 여인촌이라는 공간은 상기한 생명 권력의 역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소다. 식별역은 여인촌의 비식별역을 대상으로 욕망을 해소하며 정상성을 유지하지만, 이 과정은 어디까지나 법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기에 철저하게 묵인된다.

 

나아가 이는 삶을 지속하기 위한 여인촌 여성들의 (표면적으로) 주체적인 선택으로 포장되기에, 그들이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중 춘자가 실어증에 걸린 상태로 등장하는 것은 비식별역으로서 주체의 지위를 상실한 그녀의 처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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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가 춘자를 데리고 도망치자는 병태의 제안을 비웃었던 이유는 그가 생명 권력의 역설적인 속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비식별역과 식별역의 이중적인 속성을 모두 가지는 존재로, 생명 권력의 비극성을 일찌감치 감지한 인물이다.

 

스스로 거지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비식별역의 지위를 자처하고 있지만, 감독은 병태가 다니는 대학의 교수가 민우를 알아보는 장면을 통해 그가 이전에는 대학생으로서 식별역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익살스러운 행동과 코트 안주머니에 가득한 도구로 돈을 벌고 끼니를 해결하는데, 이는 권력의 바깥에서 생존하는 그 나름의 방법이자 지배적 질서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다. 그는 병태와 춘자 사이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식별역과 비식별역의 중간자로서 병태에게 비식별역의 세계를 보여준다.

  

근대적 권력은 식별역과 비식별역의 구별을 통해 사회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이를 위해 개인의 생명을 관리하는 데 주력한다. 아감벤은 이런 맥락에서 근대적 권력의 중심축이 감옥이 아니라 병원이나 수용소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근대 사회의 항상성이 질서에 반하는 이들을 물리적으로 격리하는 게 아니라 비식별역을 창출하고 그들의 삶을 지속시킴으로써 유지된다는 날카로운 통찰이다.

 

작품은 철창에 갇힌 동물 인서트를 같은 씬 안에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민우가 노숙하는 공간이 동물원임을 강조하는데, 동물원이 동물을 격리하는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는 시설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지속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시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생명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다. 민우가 관리인의 순찰이 잦은 동물원에 숨어지내는 것은 생명 권력에 대한 일종의 소극적 저항인 셈이다.

  

병태와 민우가 춘자를 데리고 포주들로부터 도망칠 때 병원 앞에 정차한 구급차를 훔쳐서 타는 행위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물들은 근대적 권력의 핵심이 되는 공간에 지속적으로 균열을 내며 생명 권력의 작동 양식을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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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말했듯 비식별역은 생명 권력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에 생명 권력이 만들어낸 구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춘자의 고향인 우도로 향하다 돈도 기력도 소진된 상황, 지나가던 트럭을 얻어 타기 위해 몸을 팔려는 춘자를 본 병태는 그녀를 여인촌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그녀에게 근본적인 구원일 수 없음을, 생명 권력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지옥은 어디서든 다시 생겨날 수 있음을 인식한다.

 

그 순간 병태는 춘자에게 그동안 주체로서의 선택의 권리가 없었으며, 자신이 춘자를 위한답시고 한 일들은 동정이자 기만이었음을 깨닫는다. 병태가 그녀를 놓아주는 모습은 그의 성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동시에 비식별역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민우가 근대 권력의 폭력성에 웃음으로 저항하고자 했다면, 병태는 사랑으로 근대성의 폭력에 저항한 셈이다. 결말에 다소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이라는 표현 때문에 작품에 대한 해석이 낭만주의적 차원으로 경도되는 면이 있는데, 여기서 사랑은 에로스적 의미보다는 비식별역이자 권력의 객체로 살아가던 춘자를 주체로 인식하는 방법론으로 읽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병태를 구하기 위해 춘자가 다시 말을 하게 되는 장면은 그녀가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인 동시에, 자신을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던 병태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근대적 질서에 의한 구조적 소외로부터 비식별역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상실된 그들의 주체성을 돌려줘야 한다는 결말의 메시지는 다소 뻔한 듯 하지만, 동시에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변주되는 담론이다.

 

*


배창호 감독이 소위 ‘낭만적 탐색자’로서 개인의 내면을 중점적으로 다뤄온 것은 사실이나, 그의 성과를 단순히 한국적 낭만주의의 토대로 한정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결론이다. 그의 영화가 대중성에 치우쳐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소홀했다는 비판은 그가 지적하고자 한 문제가 당대의 다른 감독이 천착한 주제들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90년대 영화가 지니는 다양성이 그의 영화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하면 조금 비약이겠지만, 적어도 그의 영화가 새로운 시대의 담론을 예고한 징후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배창호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논의는 대중성이나 낭만의 차원을 넘어 다른 관점에서도 진행될 필요가 있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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