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청춘의 한 조각, 중경삼림 [영화]

영원을 기약하며
글 입력 2021.07.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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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경삼림>은 홍콩이란 소멸을 향해가는 공간적 특성 안에 청춘의 사랑을 두 가지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현해낸다. 그 안에서 청춘들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그 끝은 아스라한 희망과 절망이 함께 한다.

 

전작에서부터 시작된 왕가위 감독의 영화적 세계관이 그렇듯 중경삼림 역시 얽히고설킨 홍콩과 영국 그리고 중국이란 세 나라의 관계 속에서 거대한 메타포로 읽히곤 한다.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을 두 국가의 걸친 홍콩의 시대적 아픔으로 읽는 건 오롯이 영화광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해석 중 하나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러한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장면은 바로 경찰 663(양조위)을 사랑하게 된 페이(왕페이)가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가 전 애인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물건을 가져다 놓는 엽기행각을 벌이는 순간일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전 애인을 영국으로, 사사건건 홍콩에 개입하는 중국을 페이로, 그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자각도 힘도 없이 손 놓고 있는 경찰 663을 홍콩으로 상정해낸다.

 

아주 절묘하게 떨어지는 비유는 한 여성의 다소 엽기적인 행동을 수긍하게 하는 힘까지 지니게 한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한 1995년, 홍콩도 한 세기도 그 끝을 향해 달려가던 때 강제성을 띤 이별과 만남을 재치 있게 그려낸 것 역시 왕가위 감독만이 줄 수 있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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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장면을 오롯이 시대상으로만 읽어내는 건 여전한 아쉬움을 준다. 전 애인의 물건 대신 자신의 사진을 몰래 가져다 놓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마냥 낯선 것은 아니기에 더더욱.

 

로맨스 영화의 명대사로 꼭 꼽히곤 하는 ‘당신은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란 감동적인 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사랑은 우리를 더 최악의 나로 만들어 놓곤 한다.

 

그게 페이의 일방적인 사랑의 환경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우리를 치사하고 또 가장 약하게 만든다. 사랑에 빠져본 이라면 찌질해진 자기 모습에 누구나 한 번쯤 허탈한 웃음을 지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가장 약한 나와 마주하고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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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장면에서 인상 깊은 건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경찰 663이다.

 

그는 무심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바쁜 일 때문인지 바뀐 환경에도 이질감은커녕 오히려 낯선 집에 점차 적응해간다. 심지어 페이가 바꿔 놓은 노래마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며 그 일을 벌인 장본인 앞에서 당당히 말하기까지 한다.

 

사랑에는 아마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시작되고 또 이미 자각한 순간에는 되돌리기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경찰 663은 페이가 그동안 자기 집에 들락날락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아마 그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그건 그가 더는 전 애인의 노래가 아닌 페이가 두고 간 노래 California Dreaming을 좋아하게 된 순간일 것이다.

 

왕가위 감독은 많은 사랑의 이야기를 가져온 후에 대게 그 사랑을 실패시키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도 지독하게 사랑해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것들이 부서지기 전에 꼭 손에 쥐어 봐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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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경삼림> 첫 번째 옴니버스에 등장한 경찰 223(금성무)은 자신의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것을 만년으로 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만년,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사랑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 하지만 그가 ‘유통기한’이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사랑은 영원과 멀어진 것이다. 그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영원을 기약하는 것, 그게 왕가위 감독의 사랑법인 것 같다.

 

 

[신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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