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 모두는 내일이 궁금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 우투리: 가공할 만한

글 입력 2021.04.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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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 빠진 영웅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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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곳에 한 평민이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어 이내 날아다니고 힘이 센 장수였다. 부모는 이 장수가 크면 장차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해서 돌로 눌러 죽였다. 아기 장수가 죽을 때 유언으로 콩 닷섬과 팥 닷섬을 같이 묻어달라고 하였다. 얼마 뒤 관군이 아기 장수를 잡으러 왔다가 부모의 실토로 무덤에 가보니 콩은 말이 되고 팥은 군사가 되어 막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결국, 아기 장수는 성공 직전에 관군에게 들켜서 다시 죽었다. 그런 뒤 아기 장수를 태울 용마가 나와서 주인을 찾아 울며 헤매다가 용소에 빠져 죽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기 장수 설화)

 

 

어렸을 적 잠이 들기 전, 어머니가 침대 맡에서 읽어주시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자라난 아기 장수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같은 설화보다도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했다. ‘우투리’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의 설화인 줄은 몰랐지만. 그 동화책의 뒤를 돌아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단번에 떠오를 정도로 어린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종종 내 겨드랑이에서도 조그마한 날개가 자라나지 않을까, 날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지 등등의 뜬금없는 망상을 하곤 했었으니까.

 

우습지만 그런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이 아기 장수가 그동안의 영웅들이 갖는 조건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라는 속담처럼 으레 영웅 서사는 별 볼 일 없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영웅에 관해 오래전부터 이어진 관습적인 클리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시작에 걸맞게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그동안의 영웅의 모습과는 달리, 우투리 설화 속 영웅은 결과적으로 개혁에 실패한다.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은 위의 고전 설화를 디스토피아적으로 해석하고, 사내아이의 이야기를 여성 영웅 서사로 가공한다.

 

 

"어디 있니, 어디에 있니. 등허리에 구름 같은 날개 달린 아이야. 우투리, 우투리, 너는 언제 올 거니.“

 

연극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노래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몇 개의 백 년 전에 시작된 전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등에 커다란 날개가 달린 영웅에 대한 고릿적 전설입니다.

 

영웅이 팍팍한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돕는 이야기는 언제건, 어디에서건 있어왔습니다. 아주 흔.해.빠.진. 종류의 것이죠.

 

우리는 그 흔해 빠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짙은 회색의 시멘트 집에서 태어난 '3'이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요.

 

- 연극 <우투리 : 가공할만한> 시놉시스

 

 

 

가공할 만한


 

 

가공하다

 

1. 두려워하거나 놀랄 만하다.

2. 원자재나 반제품을 인공적으로 처리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거나 제품의 질을 높이다.

3. 이유나 근거 없이 꾸며 내다.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나 상상으로 꾸며 내다.

 

 

우투리 설화는 가히 가공할 만하다. 이 작품은 창작집단 LAS 대표이자 연출을 맡은 이기쁨 대표와 극작가 홍단비가 고전을 재해석하고 가공하여 만들어졌다. LAS는 ‘반짝임, 갑작스러운 나타남, 활활 타오름, 놀이, 무엇에 몰두함’이란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이다. 연극, 문학, 무용, 음악, 미술, 영상 등 어느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한층 진보된 무대 언어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단체이며, 2010년부터 창설되어 지금까지 탄탄하게 무대를 지속하고 있다.

 

이기쁨 연출은 영웅은 대부분 남성이며 남성 영웅 주위의 여성 캐릭터는 영웅이 보호해 줘야 한다는 흔해 빠진 클리셰에서 탈피하고자 변주를 준다. 극에는 총 5명의 배우(김희연, 한송희, 임현국, 조용경, 장세환)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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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배우들의 연기와 안무를 제외하고도, LED 미디어아트를 활용한 무대미술과 조명디자인, 음악 또한 가공할 만했다. 무대미술은 ‘스팀펑크’와 ‘사이버 펑크’라는 키워드에서부터 아이디어를 구상해왔다고 한다. LED미디어아트를 기반으로 한 영상 활용을 필두로 단순히 발광하는 색(Color) 개념에서의 LED 활용을 넘어서 빛이 영상처럼 움직이는 미디어아트를 구현한다. 또한, 오디오와 음악에 따라 반응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 기술을 활용한 몽환적이고 독특한 무대연출이 돋보인다.

 

감정에 따라 순식간에 뒤바뀌는 조명은 극의 진행 방향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무대 뒤에는 얇고 긴 막대 형태로 설치되어있는 LED 조명의 색채와 패턴이 함께 변화하였고 웅장한 음악이 그 뒤를 탄탄히 받쳐주었다. 음악은 그룹 While asleep과 협업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우투리, 우투리, 너는 언제 올 거니. 인상적인 음악 연출에 연극의 주제가가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다.

 

 

 

불꽃이 된 여성 영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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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투리, 영웅이 될 거예요. 내가 하려는 일을 위해서 그 이름이 필요해요.“

 

 

주인공의 이름은 ‘3’,‘삼’이다. 극 중에서 삼은 보통의, 평범한 존재라고 여겨진다. 삼을 제외하고도 다른 등장인물들은 일, 이, 사. 오 등으로 불린다. 그들은 매일같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자칫하면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폭력적인 세상에 태어났다.

 

이 숫자들은 죗값을 치르는 죄수들이 부여받은 죄수 번호인 것일까. 그저 숫자 하나로 표현될 수 있는 보통의 존재.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일에서 오까지의 사람 중, 삼은 그저 그 숫자들의 가운데에 존재할 뿐이다. 그토록 평범한 삼은 영웅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강조하며 저항군 대장 일은 중앙 세력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사람들을 수탈하고 탄압한다. 삼은 사람들의 무차별적인 희생을 막고자 어느 날 새벽, 무기고를 폭파한다. 그녀의 뒤로 붉게 활활 타오르는 무기고가 선명히 보인다.

 

요리나 빨래를 하라는 식의 추궁을 듣던 주인공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불꽃이 된다. 훗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직접 움직이는 영웅이 되기를 선언한다. 그녀의 뒤로 붉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른다.

 

 

 

열린 결말?



누군가의 단말마의 비명, 아이들의 울음소리, 폭격 소리. 짙게 번진 전쟁의 참혹함 아래에서 삼은 숙였던 고개를 조용히 든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녀의 총구의 방향은 어디로 향한 것일까. 그녀가 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배우들이 직접 해설하는 낭독극 형식으로 설명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삼의 총구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그들 누구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우투리 설화의 결말은 모호하다. 구비문학의 특성상 결말 또한 분명하게 고증되지 않은 것이다. 연극에서는 이 뚜렷하지 않은 결말을 차용한다.

 

그들이 총구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때, 이미 결말은 맺어졌다.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여성이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선언한다. 그녀가 저항군 대장 일의 머리에 방아쇠를 겨누었는지, 중앙 권력을 전복시켰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분명한 것은 새롭게 등장한 여성 영웅이 목소리를 내었단 사실이다.

   

 

여러분의 '어제'가 애틋하고 '오늘'이 자연스러우며, '내일'은 궁금하시기를 바랍니다.

 

- 극작가 홍단비 (MD북 수록)

 

 

모호한 결말을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내일이 궁금한 삶을 살 권리가 있잖니’라는 극 중의 대사처럼, 목소리가 없던 사람이 발화했다는 사실은 분명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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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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