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애의 끝에 서 있을 때 [영화]

영화 <500일의 썸머>와 <봄날은 간다>
글 입력 2021.04.0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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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아닌 봄의 초입에,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려 움트는 이 시간에 어쩐지 만남의 끝에 선 씁쓸함을 느끼고 싶었다. 나의 요즘은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여유롭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매일은 나에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사람은 꼭 잔잔한 호수에 물수제비를 던져 균형을 깨고 싶어한다. 멍청하게도.

 

시작은 노래 한 곡이었다.

 

 

I just can’t explain the way it hurts.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Now that what we had is gone.  어차피 지난 일인데.

I don’t have the words. 할 말 없어.

I’m so bad at playin’ along. 다시 너에게 맞춰줄 자신도 없어.

Savin’ my feelings, I’ve been keepin’ my distance. 감정소모하기 싫어서, 그래서 멀리하는거야.

 

Ruel – distance 중에서

 

 

이미 지나간 일들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들이 있다. 그네들을 트리거(trigger)라고 부르긴 하는데, 나는 내가 트리거를 찾아나선 꼴이니 뭐라고 불러야 할 지. 그리고 예전의 시간들에 나를 깊숙히 묻고선 유영한다. 아, 나는 왜 행복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원망, 또 원망.

 

‘지금도 가사처럼 행동하는 나’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관계의 끝에서는 나를 할퀸 상처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는 일일 뿐. 펼쳐놓고 따져보기엔 나는 힘들고, 가치도 없고, 소용도 없다.

 

생각을 더 굴려서 더 바닷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보다야. 나는 또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오늘의 나는, 아직 몇 달 뒤의, 몇 년 뒤의 나보다 성숙하지 못한 나는, 모를 그 어떤 것도 있겠지. 언젠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지난 날이 되겠지.

 

그렇게 지나보낸 시간들이 뭉쳐 올라왔다. 가끔은 말로 엮어놓는 모든 행위를 통째로 내다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단어, 단어마다 스며들 기억들조차도 싫어서. 항상 그렇듯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기억하고 있는 거였고, 그게 모여 이렇게 행복한 날들에 방해가 된다.

 

어차피 이렇게 된 날에는 어느 정도 감정을 즐겨줘야 풀린다. 산책을 나간다던가, 이야기꺼내는 것 조차 싫었던 그 때를 친구들과 욕을 한바탕 한다던가, 비슷한 상황의 영화를 본다던가. 예민하기 그지 없다. 적당한 강도를 유지해야 한다. 한없이 강한 자극을 주었다가가는 무너져 내릴 것이고, 한없이 약한 자극을주었다간 한없이 긴 시간동안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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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el - Distance

 

 

영화 두 편을 보기로 했다. <500일의 썸머>와 <봄날은 간다>. 클래식한 루틴이다. 남자 주인공이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분명 한 번은 하게 되는 필름들.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영화를 볼 때 나의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필름들. 오늘 나는,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했다.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을지, 이 자리에 갖혀버릴지.

 

두 영화 모두 연애를 그리고 있다. <500일의 썸머>는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톰과 운명을 믿지 않는 썸머가 만났던 500일에 관한 이야기, <봄날은 간다>는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일반적인 ‘연애’로 관계를 정의내리고 싶지 않다는 썸머에게 구차하게 구는 <500일의 썸머>의 톰. 무지에 가까운 순정이 부담스러운 <봄날은 간다>의 상우. 이렇게 두 문장이 남았다. 그게 오늘의 나였다.

 

헌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없는 상태. 어쩌면 나 스스로와도 상한선과 하한선을 지키는 경계성 상태, 혹은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그래서 감정소모하기싫다며 거리를 두는 그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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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를 처음 보는 것이면서도 지금의 나는 확신했다. ‘내가 언제 이 영화를 봤어도 은수에게 몰입했을 거야!’ 어깨를 으쓱거리는 건방짐을 보이면서.

 

영화의 설정에서 이미 결말은 보였다. 결혼을 한 번 했던 은수, 시골에서 치매를 앓고계신 할머니를 보살피며 소소하게 살아가는 상우. 할머니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할아버지의 외도를 겪었고, 이건 상우의 끝을 알려주는 클리셰.

 

라디오PD였던 은수와 음향전문가였던 상우가 자연에서 맑게 흘러들어오는 소리를 찾아다녔던 장면이 순수한 상우와 어우러지면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끌어냈었다. 그 땐 모든 것이 조화로웠을 테니까.

 

지고지순함이 무지함으로 바뀌고, 무식함으로 치부되는 건 순식간이더라. 나는 만물의 가변성을 주장하는데, 불변성을 유지하는 척 하면서 내 가설을 무너뜨리는 모습이 부담스럽더라. 현재를 살라고들 한다지만 눈 앞의 시간만 바라보고 있는 안일함은 조금은 더 이어갈 수 있던 시간들을 소멸시키더라.

 

톰과 상우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자신의 판타지적인 사랑을 상대방에게 강요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완전해야 하는 사랑. 달콤함만을 취식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완전한 사랑의 행위자인 본인에게 느끼는 집착. 썸머와 은수는 순수한 사랑의 배신자.

 

그들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무책임한 문장이 없다. 이 문장은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영화의 제작사 로고와 함께 나오는 첫 장면이어야 할터다. 동화책만 읽고 자란 것처럼 사랑에서만은 현실성을 죄다 빼놓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무책임한 사람을 만든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무책임함을 고스란히 안는 것은 상대방이다. 요구받는 사랑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다. 타인으로 배려받지 못한 채 그냥 동기화되어버려야 만족할 테니, 분리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 끝이 얼마나 혼잡한가? 본인을 반으로 가르는 셈일테니, 스스로를 뼈저리게 불쌍하게 느낄지언정 마지막까지 본인이 상대에게 행한 폭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사랑 뿐일까? 나의 모든 관계들이다. 내가 지금 하는 생각들은 나와 접해있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다. 관계를 증설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마다 접해 있다. 사람은 ‘나’외의 모든 사람들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짐작만 할 뿐이다. 여차하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줄 안다. 그 순간, 모두가지워지고 거울의 방에 갇힌다.

 

사건의 결과를 보고 나의 생각으로 원인을 도출해내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원인을 찾지 못하면 못하는대로 무섭다. 융합은 무슨. 파국일 뿐이다. 원인을찾아내면 그것대로 더 무섭다. 온갖 오해가 쌓이기 시작하는 것이 작은 짐작들로부터인데, 짐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오랜 시간동안 유지한 관계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주어진 시간이 많아 다름에 대해 느낄 수 있던 사건들이 많았고, 그 ‘오해’를 설명할 필요성이 적어졌기때문이다. 혹은 설명하기 귀찮은 성격으로 설명할 수도. 이 이유 또한 나만의 것이다. 나는 또 내 마음대로 사람들을 틀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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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00일의 썸머>

 

 

모든 것은 변한다. 나조차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내가 어떤 비도덕적인-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부분이 ‘내가 변했다는 것’이다. ‘변화’는 나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찾는다. 어쩔 수 없었다고. 살다보니.

 

그리고 단 하나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랑. 그래서 사랑은 완벽해야 한다. 나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데도 오늘 찾아온 이 사랑은 완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나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

 

톰과 상우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우선 내 기억에는 없다. 지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태, 거리를 두고 싶은 상태를 만든 건 사랑하고 있는 두사람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썸머는 영화의 첫 화면에 등장하기 전 이미 그 모든 책임을 묻는 부연자막 “Especially you Jenny Beckman. Bitch 니 이야기야, 제니 백맨, **”라며 실명을 거론당한다. 영화를 위한 극적 장치라고 바랄 뿐.

 

이 두 사람에게 필요했던 건 썸머나 은수가 아니라 연극 ‘사랑’에 장단 맞춰줄 사람이었다. 두 영화가 지극히 한 사람의 시선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는 지쳐서 설명할 힘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두 영화의 ‘다른 사람 입장편!’이 개봉하지 않는 것도 이미 그들에겐 이미 지난 일이고, 할 말도 없고, 감정소모하기 싫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의 내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도 내가 요 근래 매우 행복하다는 것을 믿지 않을 나의 생각이다.

 

 

[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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