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을 볼 수 있어 [영화]

삶의 터널 앞에서
글 입력 2021.03.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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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저는, 터널을 지날 때면 숨을 참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생경하고 또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설레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긴장한 채 지나간 터널의 너머에는 제가 그토록 예상한 일은 대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긴 터널을 지나온 저만이 남게 될 뿐이었죠.

 

그래서 늘 허탈했지만, 터널과 마주할 때마다 그러한 행동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터널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저는 알 수 없었고 무언가가 바뀔 거란 사실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터널 그 자체가 아닌 터널로 인해 변하게 될 그 무언가가 저를 그토록 긴장케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무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삶의 다음 단계 앞에서는 우리는, 설렘과 동시에 두려운 마음을 안고 불확실한 감각에 기대어 그저 나아가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영화, ‘월플라워’는 이러한 터널을, 삶의 다음 단계를 무사히 지나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년 시절의 아픔이 있는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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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유년 시절의 성적 학대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찰리라는 한 소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풋볼 선수로 활약한 큰형과 동아리 회장인 누나와 달리 소심한 성격에다가 아픈 과거까지 가지고 있는 찰리는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며 심지어 모범생이란 이유로 친구들의 괴롭힘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던 찰리는 한 수업에서 신입생들의 긴장을 풀어주려 선생님의 흉내를 내고, 선생님에게 혼난 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행동하는 ‘패트릭’과 만나게 됩니다. 소심한 찰리에게 있어 패트릭은 자신과 달리 말도 많고 외향적인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세밀히 관찰할 줄 아는 찰리가 봤을 때 그는 분명히 좋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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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찰리는 패트릭에 대한 호감을 느끼게 되고, 어느 날 열린 풋볼 경기를 계기로 찰리는 패트릭과 그의 이복 남매인 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모인 그들의 성장을 그려나갑니다.

 

 

 

월플라워 : 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 춤을 추지 못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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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친해진 패트릭은 찰리에게 “너는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해하지. 너는 월플라워야”라고 말합니다. '월플라워'는 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 춤을 추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들이 결정적으로 친해지게 된 날 열렸던 파티에서 찰리는 파트너가 없어 벽에 기댄 채 환한 불빛 아래 춤을 추는 패트릭과 샘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그림자 속 찰리의 모습은 유난히 초라해 보였습니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의 제목은 "월플라워 :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을 볼 수 있어"입니다. 찰리가 서 있는 그곳,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을 때만 선명히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는 것이죠.

 

빛에 의해 파생된 어둠이 잠식한 삶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는 것은 실은 찰리의 존재 그 자체가 보여주듯 쓸쓸하고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 서 있으면 우리는 결코, 그 밖에서는 알 수 없었던 숨죽여 행해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찰리는 그곳에 서서 패트릭이 말했듯 그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화 초반, 선생님을 흉내 내는 패트릭을 그저 가벼운 사람이라 여기던 사람들과 달리, 찰리만은 그의 진가를 알아본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가장자리에 서 있는 찰리의 시선을 따라가 그가 속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망가진 장난감들의 섬에 온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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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역시 그런 찰리를 환영하며 그에게 “망가진 장난감들의 섬에 온 걸 환영해”라고 말합니다. 어릴 적 성적 학대로 인해 늘 자신을 막 대하는 남성과 관계를 맺는 샘, 그런 샘의 이복 남매이자 성적 소수자로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패트릭,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 좋은 성적을 유지하지만, 쇼핑몰에서 청바지를 도둑질하는 앨리스, 불교를 믿고 펑크록을 좋아하는 메리까지.

 

어느 하나 접점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샘이 말했듯 그러한 결핍들이 각자의 존재로 인해 조금은 참을 만하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령 우리가 자연스레 택하게 되는 사람과 우리 사이에는, 늘 어떤 공유된 아픔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서로의 존재가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줬기 때문일까요? 영화 후반부 샘은 점차 불건전한 관계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앨리스는 청바지를 돈을 주고 사게 되며 찰리는 우정으로 과거의 아픔을 치유해 나갑니다. 그리고 패트릭 역시 힘든 상황을 그들로 인해 극복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불완전한 그들이 만났기에 어쩌든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타인의 부족함에 빗대어 우리는 성장하고 그렇게 온전치 못한 우리 역시, 무언가를 기대해 볼 수 있으니까요.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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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금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찰리였지만, 여전히 과거의 기억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환각에, 찰리는 다시 한 번 자살 기도를 하게 됩니다.

 

대개 어린 시절의 악몽은 우리의 탓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우리의 그 어린 상태 자체가 모든 악몽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유조차 알지 못했던 왕따나 소위 잘나가는 언니 오빠들한테 돈을 뺏기는 것과 같은 일들의 표적이 되는 건, 별다른 큰 이유 없이 단지 어린 시절의 우리가 약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몇몇 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모님 역시 늘 그런 우리에게 호의적인 존재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악몽들은 우리 범위 내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고 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약한 소년이었고 누군가는 그런 상황을 이용하길 택한 것이죠. 찰리는 그저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련의 과정에 어떠한 찰리의 잘못은 존재하지도, 해서도 안 되며 찰리가 반복해서 겪는 죄의식 역시 그렇기에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미약한 우리는 수 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때로는 우리를 자극하는 것들에 의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당신이다.”라는 문구가 있듯이, 그러한 과거가 있었음에도 찰리는 여전히 온전한 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공유하는지,

너는 작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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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공유하는지, 너는 작지 않아.” 그리고 찰리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샘에게 그녀가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해줍니다. 그 역시 아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우리를 작게 만들 수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과거의 아픔이 우리를 정의할 수 없다고 찰리는 샘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말해 옵니다.

 

 

"어디서 오는지는 정하지 못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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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원한 찰리는 “우리는 어디서 오는지는 정할 수 없지만, 어디로 갈 수 있는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아니지만, 조각난 퍼즐을 붙이기 시작하는 데는 충분해”라고 말합니다.

 

비로소 길고 길었던 자신의 유년 시절에 고하는 작별과 함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됨을 알리며 찰리는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영화는 더는 자신의 삶이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찰리를 비추며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긴 터널을 모두 지나간 후 그에게 남게 된 것은 그 모든 것을 굳건히 견뎌낸 자기 자신이겠죠.

 

영화 ‘월플라워’는 과거의 아픔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아픔이 우리는 결코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인생의 출발지는 정할 수 없더라도 목적지만은 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그런 찰리의 새로운 시작이 예전만큼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그가 온전히 겪었기에, 그가 직접 터널을 지나왔기 때문이겠죠.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나요? 저는 그것이 어떻듯 여러분이 가고 싶은 방향대로 무탈한 여행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그것이 쉽진 않더라도 말입니다. 영화 ‘월플라워’였습니다.

 

 

This one moment when you know you're not a sad story

인생이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이 있어

 

You're alive

너는 살아 있어

 

And you stand up and see the lights on the building

and everything that makes you wonder

일어서서 건물의 빛과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봐

 

And you're listening to that song, and that drive with

 the people who you love most in this world

추억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달려

 

 And in this moment, I swear, we are infinite

이 순간 단언컨대, 우리는 영원해 


 

[신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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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kyj
    • 인물들의 아픈 과거는 출발지에만 불과할 뿐 방향성은 자신이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부분에서 저는 삶에 대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삶의 출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무의식중에 출발지는 의식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비중만큼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삶의 속도와 출발지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과 목적지이고, 이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영화 리뷰가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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