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세기에 보내는 21세기의 사랑 - 시선으로부터, [도서]

글 입력 2020.11.0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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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삼대의 장편 소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익히 들었던 키워드였다. 여성 서사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시점에서 삼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내가 찾던 소재이기도 했다.

 

근래 몇 달 전부터 가족 서사에 특별히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특히 가정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녹여낸 작품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키워드만으로도 이 책을 구매할 의사가 충분했다. 뭔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전개를 할 것 같달까.

 

삼대의 소설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염상섭 작가의 <삼대>처럼 이념의 갈등을 다루거나, 가치관의 갈등을 다루고 그를 통해 현대사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 보편적인 내러티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작품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여성 삼대의 이야기니,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 그 안에서 존재하는 무수한 불편함에 대해 문제를 던진 책일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2020년 6월에 발표된 이 작품은 구상부터 제작까지 5년이 걸린 작품이라고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작가의 말엔 이렇게 적혀있다.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 나는 이 책의 온기가 이 문장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대체 어떤 온기를 가진 책인지 조금씩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시선으로부터,>. 삼대의 주축이 되는 주인공 심시선의 이름이기도 한 이 제목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심시선과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그의 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주인공 심시선은 한국 전쟁 후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하와이로 떠났으며, 따라서 그 시대의 보편적 사회상과는 다르게 남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진보적인 걸음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리하여 현대에 계속해서 회자되는 인물이며, 그의 세 딸과 한 아들,  그 자녀들의 자식들까지 모여 삼대가 심시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와이로 떠나는 것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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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 장 넘기면 심시선의 가계도가 나온다. 시선의 결혼 두 번으로 형성된 조금 특이한 형태의 가계도. 시선은 하와이에서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와 얽히게 되어 독일로 떠난다. 마티아스 마우어는 죽을 때까지 시선을 괴롭혔는데, 시선이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만나 결혼한 것이 바로 요제프 리다. 잠깐 머물기로 했던 한국에서 시선이 정착해 버리자 요제프 리는 시선의 곁을 떠나며, 시선은 홍낙환과 재혼하여 경아의 가족들까지 끌어안게 된다.

 

하와이에서 치르는 제사. 보편적인 가정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형태의 문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제사는 심시선 작가 사망 10주기를 맞아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한 제사라는 점이 특이하다. 심시선은 일생 가족들에게 절대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며 당부를 했는데, 이번 10주기에는 맏딸 명혜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제사의 방식도 특이하다. 고인의 사진을 두고 다리가 휘어질 규모의 제사상을 차리는 전통적인 한국의 제사 방식을 따르지 않고 가족들 각자 하와이 여행을 통해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수집해 와 공유하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낼 것을 말한다. 따라서 소설은 가족들 각각 여행에서의 어떤 인상적인 순간을 남기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관찰한다.

 

원치 않은 스캔들에 휩싸이며 오롯이 자신을 지켜야 했던 시선,  혼란스러웠던 20세기 말을 살아냈던 시선의 자녀들과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현재의 문제들에 맞서 살아가는 자녀들까지 삼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며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서로를 보듬어주는 시선 가족들의 따스함을 보여준다.

 

소설은 업계 사장으로부터 테러를 당한 화수나 친구들과 불미스러운 일로 입장이 난처해진 규림 등 지금까지도 끝도 없이 재생산되는 현대의 문제점을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그들의 속도를 부추기지 않아 더욱더 따뜻하게 여겨진다. 또한, 어렸을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아 포기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던 우윤의 서핑 도전기까지 더해져 소설 속의 청춘 예찬에 위로를 얻게 된다.

 

소설 속 명혜가 훌라 춤을 배우는 장면이 인상 깊다. 정확히 말하자면 훌라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훌라춤 강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미국에 합병되며 자신들의 말과 문화가 없어질 뻔했지만, 로컬의 노력으로 그가 살아나서 계속해서 기억하려고 한다고. 고난의 역사가 존재하는 하와이의 원주민과 전쟁을 겪은 후 마우어에게서 정신적 손해를 입은 아시아 여성 시선. 어딘가 맥락이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 가부장제가 만연한 사회에서 꿋꿋이 모계 중심 가정을 지키며 살아갔던 여성으로서,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나가야 했던 청년으로서 모인 그들은 하와이에서 맞부딪히며 서로를 포용한다. 평범한 가족 여행이 아니라 심시선의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모였다는 것으로 봐서 아직도 심시선이 그들의 일상에 있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었다. 심시선은 이미 세상을 뜨고 없지만, 그들이 시선에 대해 공유하는 장면을 볼 땐 그 자리에 마치 시선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계속해서 회자되고 기억되는 누군가의 삶. 죽은 후에도 기억 속에 자리 잡아 회상되는 삶을 살다간 자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 하늘에서의 심시선은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싶지만, 우리에게 심시선만큼의 진보적인 존재가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어떠한 인물이. 그렇기에 화수가 하와이 여행에서도 시선의 책을 빼놓지 않고 다닌 것이 아닐까. 나도 자신만의 올곧음으로 많은 명언을 남겼던 심시선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허용되지 않을 테니,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나마 앞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용기를 얻어야겠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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