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영화]

결코 무겁지 만은 않은 이야기
글 입력 2020.10.2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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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뭐든 내 뜻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 꼭 누군가 내가 포기하길 바라듯 가는 길마다 장애물을 던져 놓은 것 같은 날. 그럴때면 누가 되었든 붙잡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하던 일을 집어던지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그런 하루를 겪는 구호단체 요원들의 이야기다. 내전으로 망가진 보스니아의 한 마을,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이 시체로 인해 오염되자 NGO 단체 요원인 '맘브루'와 그 동료들은 이 시체를 건져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규칙을 들먹이며 이를 허가해주지 않는 UN군과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마을 주민들, 그리고 눈을 뗄 수 없는 민간인 소년까지 일은 계획에서 한참 벗어나기만 한다.

 

 

 

일상이 망가진 곳에서 원칙을 지키기란


 

영화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가지 물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바로 밧줄과 공이다. 우물에서 시체를 건지기 위해선 밧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흔한 밧줄 구하기가 왜 그리도 어려운지. 가게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판매를 거부하고, 전쟁 중이라 깃발을 내릴 수 없어 밧줄을 빌려주지 못하겠다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어렵사리 찾아낸 밧줄은 사나운 개를 묶어두고 있어 손도 댈 수 없다. 그들이 마침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통에 집 뒷마당에서 목을 매단 이들의 몸에서 풀어낸 밧줄이었다. 그 고생을 해서 밧줄을 가져왔더니 이제는 UN에서 이건 지역 판사에게 맡겨야 한다며 시체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고 급기야 밧줄을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극 중 등장하는 민간인 소년 '니콜라'는 공을 뺏으려는 동네 불량배들에게서 도망치다 길을 지나던 구호차량과 마주치고, 새로운 공을 찾아주겠다는 '맘브루'의 약속에 그들과 함께한다. '맘브루'는 약속대로 '니콜라'에게 새 공을 찾아주지만 후반부에 우물에서 시체 건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선 순간, 다른 아이가 '니콜라'의 새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발견한다. '맘브루'는 영화 내내 느긋한, 모든 상황에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이 장면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동요한 듯 보인다. 마치 내 하루는 이렇게 망쳐졌지만 '니콜라'의 하루가 공을 뺏기는 일로 망쳐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돌을 든 채 아이를 위협해서 공을 뺏어낸다. 그러나 아이는 '니콜라'가 이 공을 10달러에 팔았다며 되려 큰소리를 친다. '맘브루'는 아이의 말을 믿지 않다가 '니콜라'에게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허무하게 공을 내어준다.

 

하나부터 열까지 '맘브루'와 구호요원들의 "완벽한 하루"는 좌절당한다. 때문에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똑같은 답답함과 허탈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점이 이 영화를 현실적으로 만든다. 이 영화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과장하지도, 그렇다고 미화하지도 않는다. 당장 마실 물이 없는 사람들이 한 양동이에 6달러씩 하는 물을 사 마시는 걸 보고도 무시할 것을 상부로부터 강요당하는 구호요원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이를 위협해서 다 헤진 공을 뺏는 불량배들, 그리고 폭격으로 무너진 집과 폐허 속에 목 매단 이의 시체까지 담백하게 담아내면서 전쟁의 상처가 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버린 작은 시골 마을에도 똑같은 무게로 존재한다는 것을 조용히 말하고 있다. 실제로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던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이야기는 현실과 닮아있다. 내전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재치있는 유머와 음악, 그리고 담담한 시선으로 무겁지도, 그러나 사소하지도 않게 그려내면서 전쟁이라는 요소를 단순히 영화의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전쟁이 우리의 삶과 멀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건건 구호요원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UN군은 원칙주의적이고 언제나 '규칙'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맘브루'의 여정에 동행하는 UN 현장 분석가 '카티야' 역시 영화 초반에는 UN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체를 건지려는 요원들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원칙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점차 구호요원들의 태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물론 규칙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다. 갈등과 문제를 마주쳤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원칙들을 지키는 것이 좋다. 하지만 현실은 책과 다르다. 누가봐도 우물에서 시체를 건져 올리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터무니없는 이유로 그것을 막는 UN군의 모습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무의미한 탁상공론의 피해가 고스란히 민간인과 약자에게 돌아간다는 메시지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보통의 전쟁영화가 대부분 이를 명령을 내리는 상부와 전장에 뛰어드는 병사들을 통해 그려냈다면 이 영화는 UN이라는 거대 단체와 '국경없는 원조회', 즉 NGO 단체 구호 요원들의 갈등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가 반전, 혹은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에 대한 반대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결국 시체를 건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을 때, 그들은 상부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전달 받는다. 난민 수용소의 화장실이 넘쳤으니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맘브루'의 동료 'B'는 명령 내용을 듣고 "그래도 비가 안와서 다행이야."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구호 요원들의 표정은 우물 앞에서처럼 허탈하고 무기력하지 않다. 오히려 자조적인 웃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 들인다. 카메라는 그동안 '맘브루' 일행이 돌아다녔던 장소들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마을의 우물을 비춘다. 빗물로 인해 물이 찬 우물 표면으로 시체가 떠오르자 마을 사람들은 구호요원들이 시체에 묶어 둔 밧줄을 잡아당겨 시체를 꺼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그저 흔한 원칙주의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었을 내용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완전히 뒤바뀐다. '맘브루' 일행이 끝내지 못한 일을 비가 마무리 지으며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게 된다. 구호요원들의 하루는 엉망진창으로 흘러가지만 어쨌거나 마을은 식수원을 되찾았고 그들의 고생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 또한 그럴듯한 우연이 만들어낸 해프닝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구호 차량 안에서 자조섞인 웃음으로 빗속에서 똥물을 치우러 가는 본인들의 처지를 무마할 수 있었던 것, 또 관객이 이를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이 또한 우연이 만들어 낸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나서야 영화의 제목을 이해하고 웃을 수 있었다. 전혀 완벽하지 않아 보이던 하루가 모든 것을 씻어내리듯 쏟아지는 빗줄기에누군가에게는 완벽한 하루로 탈바꿈했다. '맘브루' 일행이 과연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상황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헛수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력의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드러난다고 해서 그것이 헛수고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기합리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어쨌거나!" 라는 말 한 마디로 훌훌 털어버려도 좋다는 뜻이다. 오늘의 '헛수고'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혹은 정말 운 좋은 우연으로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는다면.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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