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뭉툭한 날을 다듬기 위해서 – 웹툰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연료가 고갈된 사람들
글 입력 2020.10.0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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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료의 고갈


 

어쩌면 이미 에너지는 한참 전에 동이 났을지도 모른다. 꾸역꾸역, 세상의 곳곳에 스스로를 욱여넣으며 불완전한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일상일지도 몰랐다. 주인공 이찬란의 삶은 꽤나 오래전부터 그랬을 테다. 월세에 쪼들리며 살고, 돈을 아끼기 위해 학식을 먹고, 그런대로 고집은 없어서 세속과 동떨어진 학문을 전공으로 삼으면서도 결국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달리는 생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토익 등 남들이 준비하는 취업 스펙을 애써 갖추고자 노력한다.

 

표정 없는 일상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늘진 얼굴로 인생의 사이클을 무던히 걸어가는 그녀는 전혀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번듯하지 못한 부모님, 번듯하지 못한 환경은 찬란에게 일찍부터 포기라는 선택지만 매 순간 유효하게 던져줬을 뿐이었다. 네 형편과 성격으로는 그런 재밌고 즐거운 일상, 누릴 수 없어. 세상은 찬란에게 그리 선언하는 듯했다.

 

그녀의 연료통은 진작에 동이 났다.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세계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했다. 기대한 게 아니었다. 죽을 것이 아닌 이상 사회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몫은 다 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타인들이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그런 노력들에 그녀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대학생답게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면서 착실하게 취업을 준비해 온전한 사회인으로 나아가는 것. 세상이 강요했던 것은 이런 정상적인 모습에 가까웠고, 지시를 따르기에 찬란은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름과 상반되게 늘상 우울하고 칙칙한 분위기로 생을 연장해나가는 그녀였다. 가급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은신하면서, 항상 체념한 상태로 사람들의 공격과 세계의 부당함에 치여대곤 했다. 기분 나빠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분명히 그것은 체념이었다.

 

“처음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려고 했어요. 4년 동안 못 찾으면 죽는 게 낫단 생각까지 했는데… 지금은 우습게도 당장 먹고 사는 걱정하기 바빠요.”

 

“우중충하고 기분 나쁜 사람 취급받을 바에야, 혼자가 편하니까.”

 

이찬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열아홉 여름이었다. 나는 그때 수험생이었다. 월요일 웹툰 신작이라 소개된 기나긴 제목에 고개를 갸웃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이 갔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반 아이들은 웹툰이라고 하면 요일별 웹툰 최상단에 자리한 대중적인 것들을 내뱉곤 했다.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름부터 지나치게 담백하고 건조한 작품. 건조해 보이는 주인공들의 얼굴. 그때 당시의 나도 썩 타인과 주변의 환경에 건조하게 굴어서였던지, 혹은 그런 건조함 사이로 스며들었던 온기의 가망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번에 그 작품의 정기 구독자가 됐다.

 

뭐야, 철학을 전공한다니. 먹고 살 궁리하는 사람치곤 상당히 이상주의적이네. (몇 년 뒤 본인의 이야기가 됐다고 한다.) 어쩌다 가입한 연극부 사람들에게 저도 모르게 벽을 치던 모습을 보면서는, 새삼스레 그녀가 세계로부터 얼마나 멀찍이 떨어져 혼자 웅크리고 있었는지 체감하곤 했다. 단지 자신이 바라지도 않았던 환경에 비자발적으로 놓였단 이유만으로 그녀는 스스로의 고단함과 비참함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저렇게 뭉툭한 날을 세우게 됐던 것이다.

 

왜 자신의 인생이 이토록 엉망으로 치달았는지 나름의 해답을 얻기 위해 철학이라는 어려운 학문도 애써 공부했건만, 대학에 와서 얻은 것이라곤 나날이 심해지는 자기혐오와 불안증. 두려움이 전제돼 언제나 실패해버리고 만 인간관계와, 어쨌건 성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책임져야 했던 생활비 문제 등 온통 숨 막히는 일들의 연속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로부터 삼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찬란에게 존재했던 날의 두께를 되짚어보면서 응축된 피로감과 고갈된 연료통을 끊임없이 목격했다. 비단 그녀의 것뿐만 아니라 내 것까지도 그랬다. 그 시절의 우리는 연료통이 고갈된 원인을 끝내 자신의 하자로 돌리곤 했다. 누구도 그렇게까지 책임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이찬란은 구태여 가족과 가난과 정신적인 아픔의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지고자 버둥거렸다.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단지 찬란은, 그리고 수많은 찬란들은 차라리 타인과 세계로 책임을 돌리기보다 자신에게 돌리는 쪽이 책임의 형태와 무게를 확실히 결정하고 붙잡아둘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비록 스스로를 좀먹더라도 직시할 수 있는 형태로 실체화할 수 있게 돼서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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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이란


 

고갈된 사람에게 구원이란,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행위에 해당할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똑같이 아슬아슬한 연료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도, 구원의 일종일 수 있다. 도래를 포함한 연극부 사람들이 찬란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저마다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갈등을 빚었던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뜻 고백하지 못한 채 열병만 마음속으로 키워가던 사람, 모친의 의존적인 성향에 숨이 막혔던 사람, 학과 내 자신을 둘러싼 성적인 희롱과 잘못된 소문이 만연하자 고통을 받는 사람. 전부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찬란은 연극부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층위가 다른 아픔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연료통이 고갈되지 않을 수 있도록 지켜봐 준 자들의 존재 덕에 찬란은 버틸 수 있었다. 각자가 가진 아픔의 무게만큼이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아픔의 크기 역시 견고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애써 보듬어주려는 사람들의 덕택에 말이다. 그로써 찬란은 버티고 버텨서 극을 올릴 수 있었고, 누군가에게 또 다른 희망을 건네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작품의 결말에서 따뜻함을 느꼈던 동시에, 어딘가 불만족스럽다는 감정 역시도 느꼈다. 어딘가 채워지지 않았던 허전함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타인에게서 구원을 찾으면 안 된다는 문구가 어떤 격언처럼 내게 견고했던 와중 찬란과 도래의 훈훈한 마무리는 다소 동화적이고 상투적인 차원의 결말로 다가왔었다. 왜 언제나 사랑이라는 지나치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상처를 감싸 안고 구원의 길목으로 들어서려 하는지. 연극부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했을 그녀에게 과잉의 감정을 되려 선사한 것이 아닌지. 방어적으로 굴었다.

 

“그러니까 누가 날 싫어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개 그 사람의 문제라 생각해요. 난 나대로 살 뿐인데, 그 사람의 과거와 편견이 날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 것 뿐이라고...”

 

“나는 지금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놓지 못해서 내 앞에 있는 진짜 중요한 걸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


삼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에게서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서 그닥 큰 영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웹툰에 부는 바람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보드랍지만, 으레 그렇듯 현실에 부는 역풍은 훨씬 드세고 잔여물투성이여서, 자칫하면 혼자 있느니만도 못한 인간관계가 펼쳐지곤 하기 때문이다. 마이웨이, 라는 말이 어째서 등장했을지 가만 생각해보면 더욱이 현실의 무게를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찬란의 행복함에 조금은 안도했던 것 같다. 웹툰 속에서마저 우중충한 결말을 논하기에 우리네들의 인생은 충분히 지난한 수준이니 말이다.

 

그제서야 자신에게 돌려졌던 책임의 화살을 바깥으로 분산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문드러진 불안감과 책무감, 부채의식에 허덕이느라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와 주변의 걱정에 응답하지 못했던 자신을 드디어 되돌아볼 수 있게 되어, 그녀만이라도 일말의 구원을 얻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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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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