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겠지만 – 윤곽 [도서]

궤적을 그리며 더듬어 가는 삶의 형태
글 입력 2020.09.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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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 세계에 대하여 당신의 문장으로 무엇을 왜곡시켰습니까.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현실을 문장으로 기록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왜곡을 동반한다. 잠 들기 전 아무도 읽지 않을 일기를 쓰면서도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완전히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나는 나의 관점을 통과해 태어난 문장으로 세계를 왜곡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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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커스크의 <윤곽>은 주인공 ‘파예’가 비행기에서부터 아테네를 떠나는 날까지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설은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탄 파예가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시작되고 그녀가 아테네에 머무르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끊임 없이 이어지며 진행된다.

 

소설 속에는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 아닌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여러 개의 사건이 동시에 흐르고 있다. 파예와 대화하는 사람들이 겪은 상실과 단절의 경험은 과거의 사건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건은 반추를 거듭하며 끝없이 다시 쓰여지고 재해석된다.

 

그리움, 수치심, 자의식, 표현되지 못한 욕망 등이 중첩되며 미묘한 조정을 거친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겪은 단절의 경험 자체를 넘어 자아의 불연속성을 낳는다. 그들은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알아볼 수도 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과거는 어떤 형태로든 남아 여전히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단절의 경험을 혼자 곱씹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실감은 점점 희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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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애초에 자신을 그렇게 단어들에 몰두하게 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단어들을 다루고 있었다.


p. 55

 

 

대화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촘촘한 대화를 통해 그들은 상대방의 경험을 자신의 관점으로 읽어내기도 하고 상대방의 관점을 받아들여 자신의 경험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서로를 전혀 모르는 인물들까지도 화자 파예를 통해 동일한 결의 주제로 포개졌다가, 다시 서로의 관점을 따라 다른 갈래의 해석으로 각자 뻗어나간다.

 

파예처럼 글쓰기 강의를 위해 아테네로 온 작가 ‘라이언’은 파예에게 과거에 집필한 소설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높은 밀도를 가진 순간에 귀속되는 감각을 설명한다. 그는 글을 쓸 당시의 폭발하는 듯한 감정은 기억하지만 그 때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과 완전히 단절된 것만 같은 자아의 불연속성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은 지금까지도 그의 인생의 기반으로 남아 계속해서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설 초반부에 등장한 이 주제는 소설 중반부 파예가 식당에서 만난 옛 지인 ‘파니오티스’에 의해 다시 도마 위에 오른다. 파니오티스는 이후에 어떤 식으로든 그를 다시 붙잡아 둘 아주 밀도가 높은 순간에 대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가 언급한 밀도 높은 순간은 다른 사건과 이어져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에 해당한다. 그는 그 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석할 수 없고 비슷한 순간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 또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간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감지한다.

 

불연속적이고 개연성을 결여한 시간. 현재의 나와 연결점을 찾기 힘들 만큼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눈을 감으면 여전히 어렴풋한 감촉이 느껴지는 그런 순간은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스며든 흐릿하고 또 선명한 얼룩과 같다. 개선을 거듭한 끝내 결실을 맺거나 저주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하는 선형적인 서사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도 모종의 패턴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겉보기에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이 불길한 암시나 행복의 서막으로 탈바꿈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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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인생이란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던 순간들에 대한 형벌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 혹은 공감하지 못했던 일들일 거라고, 그가 모르는 것 혹은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들을 언젠가는 억지로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이다.


p. 113

 

 

그러나 사건은 인생 전체를 관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잔혹한 결말을 맞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그리스의 어느 작가가 지어낸 인위적인 비극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사건은 영원히 그 시간 속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어떻게든 그들을 그 순간으로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 사건에 종교적인 암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삶은 비선형적인 궤적을 그리며 이어지고, 그 도화지 위에는 과거에 대한 단절로 느끼는 상실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현재와도 단절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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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무언가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 아닐까. 비록 그것이 그 일들을 겪은 사람들 입장에서의 설명일 뿐이라고 해도?


p. 287

 

 

주인공 파예는 비행기에서 옆자리 남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아테네를 떠나기 전 아파트에서 희극 작가를 만나는 순간까지 화자가 아닌 청자로서 존재하며 매우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서사를 드러낸다. 독자는 그가 이혼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구체적으로 들은 바가 없다.

 

파예가 마지막으로 만난 희극 작가 앤은 단절의 경험을 겪은 뒤 파예와 동일한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며 아테네에 도착한 인물이다. 그는 충격적인 사고 이후 마치 언어를 잃은 듯이 자신을 표현할 수조차 없는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한다. 그는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자신과는 극명하게 다른 성격을 가진 옆자리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윤곽을 그려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정체성의 위기를 벗어나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앤은 옆자리 남자가 자신이 그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거절하고 입을 닫아버렸던 사건을 통해 대화가 드러내는 정체성을 향한 갈망과 침묵에 투영된 단절을 향한 갈망에 대해 깨닫는다. 그리고 앤과 대화가 끝마칠 무렵 파예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앤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300페이지에 걸친 소설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발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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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역사에 따르면 수없이 공격당하고, 파괴되고 다시 세워졌던 곳이죠. 그러다가 마침내 현대에 들어서서 복구되어 지금처럼 보존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역사를 아주 잘 알게 되었죠.


p. 290

 

 

소설은 파예가 앤과 아고라로 관광을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바다에 나가자는 옆자리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끝이 난다. 파예는 옆자리 남자의 말실수를 정정하며 다소 차가운 방식으로 그와의 대화를 끝맺는다. 앤이 그랬듯 자신과 대조되는 옆자리 남자의 세부적인 면들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자신의 윤곽을 그리던 파예는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앤에 대한 공감을 통해 다시 목소리를 되찾게 되고 여행은 끝이 난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뿐입니다. 저는 그런 만남에 집중했습니다. 다른 틀이나 맥락이 더 이상 제게는 없었으니까요.”

 


레이첼 커스크의 인터뷰 中

 

 

소설 <윤곽>의 구조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경험을 듣는 것에 집중하는 파예, 그리고 소설 밖에서 그가 기록한 이야기와 대화를 통해 드러낸 파예의 정체성에 집중하는 독자가 액자식 관계를 맺고 있다.

 

파예가 소설 속에서 영원히 청자로만 머무르지 않았던 것처럼 독자 역시 영원한 독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파예는 자신을 향한 긴 여정을 끝내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마쳤다. 책장을 덮는 바로 그 순간 파예는 그의 삶으로 되돌아 갈 것이고,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자서전이 시작될 것이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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