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너머를 감응하다 -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도서]

글 입력 2024.03.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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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채호기는 화가 이상남의 작품세계에 다년간 감응해왔다. 그러한 그가 2024년에 책을 펴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난다 출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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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작품세계에 이토록 열정적일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일까. 이와 같은 채호기 시인과 이상남 화가의 교감이 담긴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감응의 회화, 정교함과 뭉개짐-이상남 작품에 대한 단상’으로, 시인이 그동안 화가의 그림과 감응해오며 분석한 어쩌면 비평에 버금가는 내용의 글이 담겨있다. 2부는 화가 이상남과의 대담으로, 이메일과 대면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대담이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 풀어낸 이상남 그림에 대해 말하기 이전, 우리는 화가의 작업방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상남 그림을 처음 마주하면 그래픽 같은 디지털적인 화면들이 곧바로 연상된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을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과정에 있어 일부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화가에게 있어 ‘오차’와 ‘허투루 함’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을 것만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만큼 이상남의 작업방식은 고도의 집중과 반복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화가는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모니터 위로 생성한다고 한다. 그렇게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들은 편집되고, 이후 스티커 형식으로 출력되어 캔버스 위로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인상 깊게 느낄 수밖에 없는 작업방식은 이러한 것이 아닌 ‘매끄러움’ 혹은 ‘갈아내기’에 있다.


 

나의 노동은 손맛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의 흔적을 지우는 행위가 노동이지만, 지우면 지울수록 내 손의 흔적은 더욱더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인공적인 매끈한 물질을 만들기 위한 노동. 그러나 아이러니는 그 과정에서 물질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 노동이 갖는 반복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에 취하게 하고, 작품에 빠지게 하는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앞서 화가에게 있어 오차가 없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화가가 스스로 그림에 ‘손맛’을 없애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작업임을 없애기 위해 화면(혹은 캔버스)을 사포로 갈아내고, 물감층을 하나 올리고, 또 사포로 갈아내길 수없이 반복한다. 이러한 작업이 결국 회화의 평평함이란 기초를 유지함과 동시에, 그러한 회화의 평면성이란 한계를 넘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회화는 ‘현재적 사실’ 자체를 그려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왔고, 이상남의 그림 또한 이러한 노력이 담겨있다. 우리에게 있어 ‘현재’란 과거를 지나와 도달한 시공간으로 생각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이 본 이상남의 그림은 “과거는 이미 지난 게 아닌 현재와 공존하고 있다”는 ‘베르그손’의 말에 의거하여, 과거 혹은 시간의 ‘층(layer)’이 보이지 않은 채 현재에 공존하고 있는 ‘잠재성’을 내포한 것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도상들의 편집과 억겁처럼 느껴지는 노력의 시간, 보이지 않는 곳의 운동까지 그려내는 작업. 그의 ‘노동’에 축적된 시간은 그림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넌지시’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화가의 그림은 평면성의 회화에 ‘깊이’를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두 사람의 교류와 화가의 작품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책의 제목 선정이 탁월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의도적으로 제목을 ‘쉼표’로 끝마쳤다(사실 끝마친 게 아닌) 생각이 들게 하는, 처음 보면 이 쉼표의 존재를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게 되는 그러한 제목.


이상남의 그림은 멈춰있지 않다는 점과 시각적인 감각 너머를 감각하게 하는 확장성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이 쉼표 같다. 그 잠재된, 보이지 않는 쉼표 이후의 무언가를 감각하도록 하는 회화. 나에게 있어 시인 채호기와 화가 이상남의 대담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만 같다. 어쩌면 예술은 이처럼 작품 너머의, 끝나지 않는 작가와 관람자의 대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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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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