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러브레터를 쓰던 기억

수많은 애증의 형태들
글 입력 2024.05.2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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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과 만났던 순간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음미하고, 요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들여다보는 건, 흡사 사랑하는 대상에게 러브레터를 쓰는 것 같다. 아니, 그 정도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던 경우에도,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쓰는 건 러브레터가 되어있다.

 

- 어쨌든, 러브레터 (2024.04.05)

 


공연 비평을 쓰는 일을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러브레터를 쓰는 일에 비유했던 적이 있다.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특정 공연과의 만남이 너무 벅찬 나머지 무엇이라도 쓰지 않을 수 없을 때 쓴다. 마감에 쫓겨 다소 억지로 시작했을지라도, 개요에 살을 덧붙이는 과정에선 나도 모르게 너무 신나서 예상된 분량을 훌쩍 넘겨 글을 써 내려가곤 한다.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아, 나 이 공연 생각보다 되게 좋아했구나.’ 역시 어느 경우에도 애정 없이 비평을 시작할 순 없다. 어쩌다보니 애정보다는 ‘애증’이 될지라도. 오늘은 지금까지 썼던 러브레터의 약간의 집필 비화와 함께 그 현실적인 애증의 형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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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이 어긋나는 사랑


 

사랑하는 마음이야 넘치지만, 가끔 내 사랑의 방식이 잘못되었을까 두려울 때가 있다. 연극 <못 말리는 프랑켄슈타인>이 그런 작품이었다. 덕분에 작품의 리뷰는 꼬박 일주일을 붙잡고 썼다. <못 말리는 프랑켄슈타인>은 대사 없이 진행되는 신체극이다. 그리고 그 형식의 이유 또한 명확했다고 본다. 누군가를 ‘괴물’이라 구분하고 배제하는 사회상을 비판하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구분을 뛰어넘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말릴 수 없는 건 어떤 정의, 통제보다도 더 큰 ‘애정’에 관한 마음이다. 모든 엄격한 규정이 말리지 못한 사랑을 논하기에 규정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을 가진 ‘말’로서의 대사는 충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작품이 머리보다 마음으로 먼저 닿을 수 있는 ‘움직임’을 극 중 소통 수단으로 사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 신분과 자존심을 넘어 타인을 위해 자신을 움직이는, 사회적 이름을 붙이는 데 사용되던 이성적인 단어들과 문장들로는 형언할 수 없는 교감의 순간이다.

 

- 능동적인 사랑의 움직임 - 연극 '못 말리는 프랑켄슈타인' (2024.05.04)

 

 

쉽게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관극 경험은 너무나 영리하게 극의 메시지와 얽혀 있었고, 내가 작품을 보고 온 날 밤잠을 설칠 정도로 이 작품에 애정을 갖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 유일한 사랑의 방식은 ‘비평’이라는 지극히 논리적인 언어 위주의 글이었다. 작품이 규격화된 언어 너머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을 예찬하기 위해, 모순적이게도 나는 다시 딱딱하고 납작한 언어 사이에 작품을 가두어 놓아야 했다. 비평은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글이고, 공연을 보지 못한 이에게도 통용될 수 있도록 나의 관극 경험을 ‘정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내 논리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았던 장면을 하나하나 상기하고 분석해 지면에 기록할 때마다 이 장면이 더 많은 이에게 닿는다는 설렘과 함께, 짧고 단호한 활자 속에서 장면이 하나하나 시들어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고민한 만큼 애착이 큰 글이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사랑해서 내 비평의 정돈됨이 칭찬받을수록 극과 나 사이에 튀었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비평가로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니까. 그것이 소원해져 버린 작품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죄책감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보여주기식 사랑


 

가끔은 정략결혼 같은 사랑도 있다. 내게는 뮤지컬 <브론테> 리뷰가 그랬다. 이 역시 쓰는데 꼬박 일주일을 붙잡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럼 너는 셰익스피어 좋아하겠다’ 또는 ‘셰익스피어 잘 하겠다’ 같은 말들이 따라붙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영문학에 관련된 작품을 볼 때면 으레 좋아서 흥분해야 하며, 리뷰에서 ‘남다른 전문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 남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걸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해왔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들이 뭘 기대하는지, 기대하긴 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한국인에게 이토록 사랑받는 영국 작가 브론테 자매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이라니. 객석에 앉자마자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제인 에어’ 또는 ‘폭풍의 언덕’에서 차용한 상징들을 찾아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무엇보다, 그렇게 찾아낸 것들에 좋아서 흥분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브론테> 리뷰 초고를 쓰면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A4용지 9장 분량의 초고를 썼고, 그건 내가 발견한 문학적 상징들의 나열과 분석에 불과했다. 100분 짜리 극을 보았다고 비평도 100분 동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비평에는 논리에 꼭 필요한 중요하거나 특징적인 장면들이 드러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작은 상징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나라는 사람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지만 극의 작은 일부들에 집중하고 분석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래서 이 극 전체가 말하는 것이 뭐였지’를 떠올렸을 때, 나는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브론테>의 인물들이 결국은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인정받는 글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글을 쓰라고. 샬럿의 내면에 있던 인정받길 바라는 억압적인 자아를, 리뷰를 쓰는 내 안에서 만났다.


 

샬럿의 후회가 나타나는 동안 무대 전체는 조명 빛으로 새빨갛게 물든다. 마치 소설 <제인 에어> 속 손필드를 태운 불길이 요크셔의 집마저 집어삼키듯. <제인 에어>에서 ‘불태움’은 중요한 요소이다. 소설 속 로체스터는 난폭함을 보이는 아내 버사 메이슨을 ‘광인’이라 낙인찍고 집의 깊숙한 방에 감금한다. 버사는 저택에 불을 질러 로체스터를 무력화시킬 때 비로소 로체스터의 통제를 상징하는 방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녀의 죽음이다.

 

자매들을 잃은 샬럿은 자신이 안정적인 성공을 위해 기존 가부장적 사회의 관점으로 에밀리의 욕망을 광기로 낙인찍고 억압했음을, 즉 자신이 오만한 로체스터였음을 깨닫는다. 불같이 맹렬한 후회는, 샬럿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샬럿 자신과 에밀리, 앤의 행동 또는 사고 범위를 통제했던 작은 방 전체를 태운다. 그렇게 샬럿은 자신 안의 로체스터를 무력화시킨다.

 

- 문장 너머를 읽어줄 독자들에게 - 뮤지컬 '브론테' (2024.04.03)

 

 

나는 다른 사람들, 사실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그들이 원할 거라 생각하는 작품과 나의 관계를 꾸며내느라, 작품의 진정한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점을 깨닫고 나니, 내 욕심의 일부를 기꺼이 불태우고 글을 덜어낼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가지 못할뻔한 러브레터는 작품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마침내 발송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는 사랑


 

마지막으로 뒤늦게 깨닫게 되는 사랑도 있다. <제방의 북소리>는 학교 과제로 보았던 작품이다. 실황 영상 자료로 관람했는데, 무려 음성 언어는 프랑스어로 송출되고, 자막은 한국어 지원이 안 돼서 영어로 설정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사람들이 인형 연기를 하며 양식화된 움직임과 목소리 연기를 보여주는 데서 오는 낯섦 위에 언어의 낯설음까지 합쳐지니, 극을 느끼기보다는 본의 아니게 시종일관 인상을 쓰면서 극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글을 쓰는 데 15일 이상이 걸렸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놓친 게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개요만 짜 놓고 글을 시작도 못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결국 내가 고개 돌리지 않고 인상을 쓰면서까지 영상을 보려고 고군분투한 이유도, 포기하지 않고 2주 동안 노트북 앞에 앉아 화면을 쳐다보았던 이유도 결국에는 작품이 내게 닿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단순해졌다. 놓친 건 놓친 대로 이유가 있을 터이니, 내게 남은 것들을 쓰자. 남은 것은 내가 조금이라고 감명받고, 애정했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작가 엘렌 식수는 1998년 중국에서 일어난 대홍수를 모티브로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은 한국의 사물놀이, 일본의 분라쿠, 그 외에도 아시아의 다양한 의복과 예술 양식을 흡수한 채 작품 속 사건이 발생하는 명확한 장소의 제시를 흐리고 있다. 아시아 문화권 안에서 뿐만이 아니다. 동양인의 모습을 한 인형의 대사들은 프랑스어로 발화되며, 국적의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흐리고 있다. 작품 속의 재난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품은 영상으로 남아 2024년 현재에도 어디에선가 상영되고 있다. 지나간 작품의 흔적을 현재에 다시 보는 것은 시간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또 다른 형태의 재난을 마주하고 있는 전 세계에 닿는다. 그렇게 작품은 재난 속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오늘날의 고민과도 맞닿을 수 있다.

      

- 재난을 연극으로 담아내기 - 연극 '재방의 북소리' (2024.03.13)

 

 

이처럼 <제방의 북소리>는 동양의 이야기와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프랑스 태양극단이 공연한다. 이질적인 문화가 닿아 만들어낸 공간과 시대의 구분을 넘어선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 낯선 세상의 언어와 형식에 닿으려 애쓰며 글을 써 내려간 과정이, 글을 마치고 나니 오히려 <제방의 북소리>와 어울리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더 기억에 남는 글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내가 어째서 이렇게 애’증‘하면서까지 글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도 100퍼센트의, 아니 한 80퍼센트 정도라도 되는 사랑이라면, 러브레터를 쓰는 과정이 늘 즐거울 것이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글을 쓰다 보면 20퍼센트의 사랑과 80퍼센트의 괴로움을 느끼는 순간도 드물지 않다.

 

나의 글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글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편지의 수신인에 내 글을 읽는 독자 역시 해당되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한 명이라도 내 글을 보고 공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좋겠다는 바람, 공연을 보러 올 예비 관객이 될지도 모르는 독자에 대한 애정은 항상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연극인이 되기를 바랄 수 없다. 그러려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연극에 흠뻑 젖어 본 경험이 마음 한켠에 있었으면 좋겠다. 살면서 이따금 떠올릴 작은 보물이 되면 좋겠다.

 

- 연극 (해)보기를 권하는 이유 (2024.04.19)

 

 

이 글을 읽어 내려간 당신에게 연극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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