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쨌든, 러브레터 [공연]

초짜 비평가의 딜레마
글 입력 2024.04.0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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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또는 평론을 쓰는 일은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러브레터를 쓰는 일 같다. 공연의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는 순간은, 공연에 대한 애정과 흥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을 때이다. ‘평론가’ 또는 ‘비평가’라는 이름이 가진 고정관념이 그 애정 어린 전제를 가리는 듯 싶다. 평론가라는 이름을 들으면, 꼭 공연을 트집 잡고, 혼내려는 사람들인 것만 같다. 공연의 좋지 않은 면을 조목조목 찾고, 공연을 미워하러 극장에 오는 사람들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연의 울림이 충분히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평론은 시작되지도 못한다.

 

비난과 비평은 다르다. 비난은 근거 없는 증오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은 그래서는 안 된다. 문제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을 왜 문제라고 느끼는지 자기 자신과 독자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는 근거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가에 앞서, 작품에 담긴 창작자의 의도와 시도를 꼼꼼히 읽어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분석하고, 검토하고, 또 생각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일말의 애정 없이 행할 이는 없다.

 

그래서 나는 평가를 하고 싶을 때보다 오히려 작품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고, 흥분되는 마음으로 온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 평론을 쓰기 시작한다. 작품의 전체가 되었든, 일부가 되었든,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실재하는 주변 사람들 중, 한자리에 앉아 나의 애정 넘치는 길고 긴 말을 들어줄 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연과 만났던 순간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음미하고, 요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들여다보는 건, 흡사 사랑하는 대상에게 러브레터를 쓰는 것 같다. 아니, 그 정도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던 경우에도,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쓰는 건 러브레터가 되어있다.

 

그럼 그렇게 예뻐하는 대상에 대해 왜 쓴소리를 하는가? 그건 저 공연이, 저 공연의 창작자들이, 공연계가 더 잘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하고, 그래서 더 다양한 고백들과 러브레터를 받아볼 수 있는 공연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게 평론을 쓰는 이유와 목적을 묻는다면, 나는 그 중심에 ‘서로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나의 말들이 무례함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닌지 고민될 때, 이 마음을 되새기면 다시 길을 찾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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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써야 하는가? 


 

가끔 내 평론이 너무 조심스러운 애정으로 이루어져 문제가 된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 교수님은 나에게 “네 글에 네가 속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세심하게 오랫동안 작품을 읽어내려 하는 나머지, 내가 모든 작품을 ‘재미있게 보았다는’,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작품의 일부를 좋아하지만, 전체 짜임새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작품이 나에게 지루했을지라도, 그 가능성과 매세지가 와닿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희곡 창작 수업에 참여했을 때, 타인의 작업물을 합평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공격적인 어투의 비판이 대부분 오갔다. 그로 인해 초보 창작자에게 발생하는 가장 좋지 않은 일은, 그 뼈아프게 남은 지적들을 바탕으로 작품을 수정하느라 작품이 원래 가진 장점마저 놓치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한 상황들을 보며 결심했다. 작품에 대해 좋지 않은 점은 어디서든 많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의 좋은 점을 듣기는 힘들다. 그 좋은 점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되자, 상처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닿기 위해 작품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글로 말해주자.

 

하지만 초짜 비평가인 나인지라, 그 마음가짐이 낳은 말들은 ‘작품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적 평가’로 보였나 보다. 필자가 직접적으로 ‘좋다’, ‘좋지 않다’와 같은 가치 판단의 어휘를 쓰지 않아도, 작품을 세밀하게 분석하려 드는 문장들의 행간에서 필자의 ‘긍정적 평가’가 읽힌다고 했다. 서로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으나, 서로가 진짜로 잘 되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면, 내 글은 어디로 가야 할까?

 

또한 가끔은 작품성에 대한 평가가 창작자의 진심, 또는 당사자의 진심을 해치는 느낌이 들어 죄책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언젠가 졸업 작품을 쓰려는 극작과 대학원생과 교수가 등장하는 2인극을 본 적이 있다. 성폭력의 피해자였으며, 교내 위계 폭력을 마주한 대학원생은 희곡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하지만 교수는 작품의 완성도를 지적하며 작품을 더 많은 대중에게 닿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라 조언한다. 사회의 약자로서 침묵을 강요당한 자신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다시 사회적 기준에 맞춰 깎아내야 한다는 것이 대학원생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참여했던 비평 워크숍에서 수강생 각자는 이 작품에 대한 평을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내면에서는 복합적인 마음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 속 교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학생의 글을 읽는 비평가 같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평하는 제 자신이 작품 속 교수와 같지는 않은지 고민이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저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서로 잘 되길 바란다’는 문장의 ‘서로’ 속에는 작품 속 이야기를 실제 겪고 있을 당사자 역시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는가? 내가 설정한 좁은 범위의 ‘서로’로 인해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더 많은 시행착오가 존재하기를


 

사실 이 모든 것은 초짜 비평가가 겪는 시행착오의 일부일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평가’라는 이름을 들으면, ‘선생님’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공연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아는 박식한 권위자이며, 거의 틀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것은 ‘평가’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권위라는 요소가 요구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평가의 근거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이론적 근거들이 글에 언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도 같다. 허점이 없을 때 비로소 결과를 세상에 낼 수 있다는 부담감은 비평가에게 유독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국의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은 자신의 저서인 <빈 공간>에서 비평가의 시행착오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작자만큼 비평가도 자신의 목표지점을 분명히 가지고 이를 용감하게 실험해보며,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수정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층 질 좋은 비평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창작자와 비평가 간의 교류도 늘어 공연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이 강화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앞서 밝혔듯 비평은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러브레터를 쓰는 일이다. 공연이 올라간다면 ‘관객’이라는, 공연이 가 닿는 수신인이 가시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비평은 한번 어딘가에 공개하고 나면, 그것이 프로덕션에 닿는지, 관객에게 닿는지, 또 다른 누구에게 닿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늘 내 글이 내 방안에서의 혼잣말로 끝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깊은 애정을 겪어야 하다 보니, 문득 밀려드는 허무함은 나에게 크게 다가온다. 비평을 쓰는 내내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헛헛함이다. 또한 독자의 비가시화로 인해 독자 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이것이 창작자의 성장을 위한 글이 되어야 하는지,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새로운 해석을 열어주는 글이 되어야 하는지, 글의 구성과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불확실성이 뒤따른다. 이는 좋은 비평을 저해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창작자와 비평가, 관객과 비평가가 닿을 수 있는 더 활발하고 확실한 통로가 마련된다면, 공연이 평론을 불러일으키고, 평론이 더 좋은 공연을 불러일으키며, 그렇게 발전된 공연에 더 다양한 시각을 가진 관객이 찾아오는, 공연계의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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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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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llo021
    • 안녕하세요. 분야는 다르지만, 비평에 관심이 많은 한 사람으로서 글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비평은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러브레터를 쓰는 일이라는 문장이 특히 와닿았습니다.
      내 글이 혼잣말 같다는 말도요.
      좋은 의견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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