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미술/전시]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를 다녀와서
글 입력 2024.06.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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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igners Everywhere" 

 

60주년을 맞은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제목이다. 80개국의 331명의 아티스트 및 컬렉티브가 참여한, 여러 관점에서의 “외국인(foreigner)”들을 불러들인 축제였다. 정체성, 국적, 인종, 섹슈얼리티, 자유, 부(富)로 조건 지어지는 차이를 중심으로 이주, 소외, 퀴어, 아웃사이더, 소수자, 토착 미술의 키워드가 등장한다.

 

 

Foreigners Everywhere.jpg

 

 

 

전시 제목에 대하여


 

우리말로는 "foreigner"를 외국인으로 번역했지만, 의미상으로는 외부인 또는 이방인이 어울린다. 이번 비엔날레의 총괄 큐레이터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는 우리는 어디에 가든 외국인을 마주하며 그들/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스스로를 어디에 위치시키든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이러한 제목을 제안한다.

 

비엔날레는 다양한 국가와 문화에서 온 여러 작가들의 작업을 초대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모든 작업을 꿰어 내기 위해 제목이 포괄적이고 추상적일 때가 많다. 이번 제목은 2020년 “The Milk of Dreams”, 2019년 “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 등 시적이고 수수께끼같은 이전 제목들과 비교했을 때 꽤 직접적이다. 여전히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잠깐 제목에 관한 논란에 대해 언급하자면, 현대미술가 아니쉬 카푸어가 외국인(Foreigner)이라는 단어를 두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슬로건이 이탈리아 정부의 반이민(anti-migrant) 입장을 강화하며 신나치주의(neo-fascism)를 불러일으킨다는 주장에 필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국제적 행사인 만큼 이탈리아 원어보다 영어 제목으로 접근하자면, "foreigner"라는 단어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비서구권 배경의 사람에게도 부정적으로 느껴질까 의구심이 들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중립적인 단어로 여겨졌고, 오히려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이미지와 어감을 주입하는 행위가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엔날레와 뮤지엄 사이


 

베니스 비엔날레는 크게 자르디니(Giardini), 아르세날레(Arsenale), 오프-사이트 파빌리온(Off-site pavilions)으로 나뉜다. 자르디니의 센트럴 파빌리온과 아르세날레의 인터내셔널 전시를 중심으로 국가관(National pavilions)들이 분포해 있다.

 

자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은 뮤지엄 전시 같았다는 일부 리뷰에 공감한다. 비엔날레라기엔 조금 평범했고, 다이나믹한 느낌이 적었다.

 

프리즈(Frieze) 매거진의 센트럴 파빌리온 리뷰에서는 이번 비엔날레가 좋은 의도를 가진, 심사숙고한 기획임은 분명하지만 기쁨과 흥분의 순간이 없었고, 과한 진지함과 열성이 오히려 조금의 혼란을 기대하게 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만약 외계인이 이번 연도 비엔날레에 착륙했다면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표현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뉴미디어 작품의 부재가 전체적으로 뮤지엄 전시 같다는 인상에 한몫했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뉴미디어 작품이 너무 많아서 피곤할 정도인 요즘 국제 전시 트렌드와 대비되는 작품 선택은 대범할 정도로 전통 매체 중심이었다.

 

 

 

자르디니, 새로운 발견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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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파빌리온, Ione Saldanha의 "Untitled"

 

 

아트뉴스페이퍼(The Art Newspaper) 팟캐스트에서 소개했듯 자르디니 파빌리온에서 가장 강렬하고 눈에 띄는 테마는 추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북미와 유럽의 추상에서 벗어나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랍, 아시아의 추상을 내세웠다. '추상'하면 쉽게 떠올리는 몬드리안, 칸딘스키와 차별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기하학 추상이 특히 좋았다. 기계적인 추상이 아닌 신체적인 추상. 추상의 종류와 형태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음을, 추상의 개념 또한 유동적이고 탄력적임을 보여준다. '추상'의 가능성을 넓힌 전시라 생각된다.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라는 질문을 떨치기 어려운, 조금 낯선 스타일의 작품들도 한가득이었다. 예를 들어 아웃사이더 아트나 서양미술사에서 “키치(Kitsch)” 하다고 여겨온 작품들을 마주하며 여전히 통용되는 “주류 미술”과 “비주류 미술”의 분류, “주류 미술”에 대한 관심과 “비주류 미술”에 대한 무관심을 돌아보게 됐다.

 

우리가 미술 교과서와 미술관에서 접하는 작품들은 그 종류가 얼핏 보기에 다양한 것 같아도 사실 제한적이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본 작품들 중 일부는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런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가치 판단의 혼란이 오기도 한다. 노출의 빈도가 취향과 가치 판단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기존 체계를 유지함으로써 우위를 점하는 자는 늘 있으며, 미술계를 작동시키는 특정 시스템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 앞에 서서, “이게 좋은 작품인가?”라는 유치한 질문을 던지며 우물쭈물하는 필자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가치판단 체계를 알게 모르게 형성한 여러 요소들을 곱씹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각자 너무나 다양한 개성을 품고 있어 섞이지 않을 듯한 작품들을 한곳에서 만남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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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이강승의 "Constel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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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 김윤신의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자르디니 센트럴 파빌리온에 초대된 한국 작가로는 김윤신, 이강승 작가가 있었다. 특히 김윤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방에는 그의 조각들을 중심으로 아랍 모더니스트 작가 아르프 엘 라예스(Aref el Rayess)의 사막 시리즈 회화가 벽에 빙 둘러 걸렸다. 김윤신 작가의 자연 재료로 만든 유기적인 조각들과 그 주변으로 파노라마를 이루는 라예스의 풍경 회화가 하나의 작품처럼 어우러져 충만한 감상을 가능케 했고, 이처럼 이유 있는 큐레이션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내셔널 파빌리온, 한국관과 호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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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오도라마 시티"

 

 

26개 국가관 중 한국관에서는 구정아 작가가 향기를 소재로 전시했다. 비엔날레 내내 시각, 그다음으로는 청각에만 집중해 피로한 두 감각은 잠깐 쉬고, 후각으로 공간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한국관은 독특했다. 다만 적어도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아 전시장이 조금 빈 느낌이라 임팩트가 적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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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국가관, 아치 무어, Kith and Kin

 

 

아치 무어(Archie Moore)의 작업을 선보인 호주 파빌리온이 인상 깊은 국가관 중 하나였는데, 관객을 조용히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높이가 다른 흰 블럭들이 쌓여 있었다. 물에 떠 있는 테이블은 호주를 형상화하고, 흰 블럭으로 보였던 것은 쌓아 올려진 A4 용지들로, 이 500여 장의 문서들은 경찰에 구금된 호주 원주민들의 사인 규명 문서들이었다.

 

검은 벽에는 흰 분필로 빼곡하게 적은 이름들이 6만 5천여 년에 걸친 거대한 가계도를 이루는데, 중간중간 지워진 이름들 또한 학살이나 잔혹행위에 의해 사라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엄숙한 분위기의 이 직사각형 공간은 결국 공권력에 희생당한 원주민들의 죽음을 기리는 메모리얼로 작동한다.

 

 

 

아르세날레, 전시장을 떠다니는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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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날레에 설치된 유리 이젤

 

 

베니스의 옛 국영 조선소와 무기고로 쓰이던 곳을 전시장으로 개조한 아르세날레는 공간이 주는 힘이 확실히 있었다. 아르세날레 인터내셔널 전시 중 유리 이젤(glass easel) 섹션이 인상적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브라질에서 활동한 모더니즘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가 1968년 상파울루 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였던 유리 이젤을 차용했는데, 이 유리 이젤은 미술관 디스플레이 역사에 전설적으로 남아있다.

 

보 바르디가 고안한 유리 이젤은 두꺼운 유리 플레이트 사이에 그림을 끼우고 이 투명 패널을 콘크리트 큐브가 지지한다. 작품 캡션은 캔버스 뒤쪽 유리에 부착되어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제목, 작가, 연도 등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오직 그림만 눈에 담게 된다.

 

처음 이 섹션으로 들어왔을 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수십 점의 그림들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반대로 돌아오는 길에는 시야에 작품 뒷면만 가득한 풍경이 신선했다. 작품을 “순수하게” 그 자체로 감상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하는, 현 시각에서는 실패한 형식적 모더니즘의 전제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 장치가 오히려 캔버스 뒷면까지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오브제로써 작품이 걸어온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 비판과는 반대로 그림이 평면 위에 재현된 이미지이기 이전에 실체를 가진 하나의 물체이자 사회적 산물로 이해된다.

 

 

 

마치며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성별, 다른 정체성, 다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보편성과 특수성이 무한히 교차되는 자리로서 이번 비엔날레는 시끌벅적한 축제이자 누군가에겐 묘한 위로의 공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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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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