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능동적인 사랑의 움직임 - 연극 '못 말리는 프랑켄슈타인' [공연]

인간의 진정한 발전이란 무엇인가
글 입력 2024.05.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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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친숙하다.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리에 나사가 박힌 기괴한 얼굴이나, 혈색 없는 시체를 되살리는 행위가 쉽게 연상되곤 한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각색 또는 차용되며 우리 곁에 있어왔다.

 

이렇게 고착화 된 이미지가 존재하다 보니, 연극의 제목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왜 하필 ‘못 말리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으스스한 이름과 명랑하고 장난스러운 수식어의 결합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낯설고, 불균형이 도드라진 외형을 가진 제목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만큼이나.

 

작품의 형식 또한 제목의 양상을 그대로 따라간다. 작품은 원작이 가진 위계와 소외, 차별, 그리고 진정한 포용에 대한 다소 무겁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오히려 익살스럽고 코믹한 톤으로 풀어나간다. 대사 없이 움직임으로만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공연은 다층적이고 어려워 보이던 논점들이 더 많은 관객에게 쉽고 감각적으로 다가가게끔 돕는다.

 

지난 4월 24일부터 28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 <못 말리는 프랑켄슈타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개원 30주년 기념을 맞이해 공연된 청소년극이다. 남긍호 연출을 포함한 창작진, 배우, 공연 진행 인원 모두가 연극원 출신이다. 또한 연극원 졸업생인 뮤지컬배우 최재림, 송상은이 특별출연하여 재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오름으로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랑켄 포스터.jpg

 

 

 

무대의 이면, 사회의 이면


 

사회적 계급이 뚜렷한 시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시체를 이용해 매력적인 피조물을 탄생시키며 학계를 놀라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모두의 찬사를 받는 아름다운 악혼녀, 엘리자베스도 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 파티를 방해하는 불청객들이 등장하며 상황은 반전된다. 박사의 실험 과정 중 버려진 무수히 많은 ‘실패작’ 들이 연회장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버려진 이후 흉측한 외모로 인해 ‘몬스터’로 낙인찍히고 배척당하며, 늘 애정을 그리워하던 한 피조물이 그 선두에 있다.

 

공연의 가장 독특한 점 중 하나는 공간의 활용이다. 무대 중간에는 벽이 하나 세워져 있다. 벽을 기준으로 한쪽은 본래 극장의 객석이 위치하는 곳이고, 한쪽은 무대 뒤쪽으로, 별도로 설치된 좌석들이 놓여있다. 전자는 ‘객석’, 후자는 ‘무대석’이라 불린다. 각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벽 반대쪽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볼 수 없으나, 배우들은 벽에 난 문을 통해 무대 양쪽을 넘나들며 연기한다.

 

객석 쪽에서 보이는 무대 위 풍경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실이다. 규격에 맞지 않거나 ‘흉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나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말끔하게 정돈된 백색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박사의 어머니와 프랑켄슈타인 박사, 그리고 두 조수가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살고 있다. 이 공간을 드나드는 이는 주로 박사가 창조한 ‘아름다운’ 피조물과, 양복 또는 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권위 있는 귀족들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간이자 외적인 미와 질서의 세계이다.

 

반면 벽 너머 무대 뒤편에 보이는 건 어지러이 흩어진 절단된 사람의 신체 부위와 버려진 피조물들이다. 피조물들의 옷과 벽면은 온통 회색빛이다. 버려진 피조물들이 달려가며 지나치는 인간군상이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펼쳐지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전쟁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절망 속에 끝없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무대석에 앉으면 보이는 이곳은 ‘몬스터’라 불리는 피조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이다. 동시에 프로시니엄 무대의 프레임 속 정제되고 아름다워 보였던 풍경의 ‘뒤편’이다. 질서정연한 계급사회 이면엔 이렇게 혐오와 차별이라는 어두운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다.

 

 

 

메세지의 경험적 확장


 

벽으로 분리된 두 공간의 이야기는 동시 진행되며, 분리되어 진행되기도, 유기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한쪽의 이야기를 놓칠까 봐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공연은 인터미션을 사이에 두고 1막과 2막이 완전히 동일한 내용으로 진행된다. 같은 공연이 두 번 반복되는 셈이다. 단, 1막을 객석에서 관람한 관객은 2막을 무대 석에서 관람해야 하며, 1막을 무대석에서 관람한 관객은 2막을 객석에서 관람해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다.

 

자리를 바꾸어 벽의 양쪽에서 관람함으로써 관객이 인물들에 대해 가지는 태도는 변화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극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잘 맞닿는다는 생각이다. 객석 쪽, 박사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강조되는 것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기대와 요구를 견뎌야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박사이다. 또한 그가 피조물을 내버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명확히 제시된다. 반면에 잠깐씩 등장하는 피조물의 경우, 박사와 주변인들의 삶을 부수는 존재, ‘괴물’과 같은 폭력성을 가진 존재로 주로 묘사된다.

 

하지만 무대 뒤편, 무대석 쪽에서 보이는 건 피조물이 견뎌내어야 했던 삶의 모습들이다. 남들과 다른 외모와 걸음걸이에 차별과 배제를 당하며, 등에는 ‘Monster’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M’자 낙인이 새겨진다. 사랑을 갈구했으나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타인에게 의도치 않은 해를 끼치고 마는 피조물의 고독과 서러움이 전면에 부각된다. 반면에 그를 무시한 채 평화롭게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으로 잠시 등장하는 박사의 이미지는 매정하고 악하게 보일 뿐이다.

 

한 공간에서 박사 또는 피조물의 치우친 시선으로 제시되는 이야기는 서로에 대한 파편화된 정보만을 제시하고, 이는 관객의 선입견 어린 유추를 낳는다.  하지만 다른 쪽 무대에서 시점을 바꿔 다시 한번 펼쳐지는 이야기는 관객이 심리적으로 배제하던 인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선입견과 자신이 타인을 인식하던 태도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든다.

 

무대의 구조는 타인에 대한 진정한 포용의 조건이 ‘능동성’임을 경험적으로 제시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관객 각자가 좌석 이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자신 앞에 놓인 세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여긴다면, 두 눈을 뜨고도 작품 속 세상의 반쪽밖에 보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관객은 인터미션 이후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 반대편 좌석으로 걸어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 속 세상의 전체 퍼즐을 맞출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영역에 주어진 좁은 시야를 넘어서서 ‘마음의 눈’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타인의 세상에 다가가려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포용과 이해를 위한 태도적인 부분을 전달함과 동시에, 세상을 파악하고 미지의 영역을 알게 하는 인류의 ‘발전’은 박사의 실험이 대변하는 과학기술의 향상뿐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의 시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프랑켄 공연사진1.jpg

 

 

 

누가 무엇을 괴물로 만드는가


 

작품은 특히나 청소년기 관객, 또는 관객의 ‘청소년기 경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원작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을 삽입한다. 박사와 어머니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극 중 박사의 어머니는 박사의 단정치 못한 행동과, 조수들의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매섭게 통제한다. 또한 박사의 식사 시간에 음식 대신 책 페이지들을 씹어 삼키게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교육열과 성과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사는 처음에 자신의 행동을 따라하며, 자신과 같은 사람임을 보여주는 피조물의 모습에 친근감을 가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피조물을 내쫓을 것을, 더 나아가 죽일 것을 명령하는 것도 어머니이다. 이는 차별과 배제가 성과주의와 무한 경쟁에서 상실된 인간성으로 인해 자라났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오늘날 높은 교육열과 학업 경쟁 속에 심리적 압박을 절실히 느끼는 청소년기 상황을 작품과 연관 짓는다. 어머니가 실험대에 누워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꾸짖듯 호령하고, 어머니를 발견하고서 벌떡 일어나 실험을 시작하는 박사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마치 나 자신과 내 친구의 일상을 보듯 현실적이다. 이는 옛 서양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관객 주변의 이야기로 만들며, 인물에 가까이 공감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각 인물에 대해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극의 중간에는 발레 연습실, 걸그룹 ‘르세라핌’의 노래가 나오는 헬스장, SNS 인플루언서가 릴스를 찍고 사라지는 공원 등이 등장한다. 모두 현대적인 공간이자. 외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을 과시하는 상황과 장소들이다. 남들과 다른 흉한 외모로 배척당하는 피조물의 여정에 이와 같은 삶의 모습들이 삽입된다. ‘소셜미디어’가 성행하는 세상에서 내면보다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현실이, 타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공고히 하고 특정 인물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켰음을 꼬집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작품이 보다 오늘날의 청소년을 둘러싼 세상과 닿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극의 중요한 점 중 또 하나는, 극이 진행될수록 ‘우아한 것’과 ‘괴물같은 것’의 절대적 경계가 흐려진다는 점이다. 정돈된 객석 쪽 공간과 어두운 무대석 쪽 공간 중 오직 한쪽 세상에서만 연기하는 배우는 없다. 어색한 걸음걸이로 걷던 버려진 피조물들은 점점 귀족들과 차이가 없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반면에 옷에 무언가 묻었다는 이유로, 상대가 춤을 추다 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괴성을 내지르는 박사와 엘리자베스, 좋은 옷을 입고 고상하게 걸으면서도 절단된 시체를 효자손처럼 사용하는 섬뜩하고 비인간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과연 누가 진정 ‘괴물’과 같은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두 공간을 구분짓던 무대 위 벽의 문이 열어젖혀지며 더 강력하게 다가온다. 극의 후반부, 피조물들의 연회장 습격 이후 귀족들과 피조물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장면은 모든 인물들 안에 똑같은 두려움과 자존심, 폭력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때 무대 중앙에 놓인 벽의 문이 열리며 인물들은 벽의 중앙 경계에서 다투기 시작한다. 허물어진 물리적 공간의 경계는 세련된 외향을 갖지 못한 이들보다, 같은 권리를 가진 이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이들이 오히려 인간성이 상실된 ‘괴물’같은 존재가 아닌지를 지적한다.

 

극 중 인물들의 선망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운 여인 엘리자베스가 후반부에는 피조물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한다는 것이 극의 메세지를 집약한다. 이전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와 드레스로 외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엘리자베스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후 헝클어진 머리와 찢어진 옷을 입은 모습으로 다시 재탄생한다. 두 세계를 한 몸에 담아내게 되는 ‘사랑'의 상징적 인물은, 진정한 사랑이란 외적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뿐만 아님을 단번에 전달한다. 오늘날 인간관계의 추한 이면들, 증오, 분노의 존재까지 마주하고 인정하며, 이전에 알던 편협한 사랑의 개념을 ‘재탄생’ 시킬 때 그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능동적 사랑과 포용의 움직임


 

극이 진행될수록 제목의 ‘못 말린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점점 넓어진다. 귀족들과 동등한 것을 누리고자 하는 피조물의 욕구와 그로 인한 반란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피조물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박사는 피조물과의 과거 짧고도 정든 추억을 회상하는 자기 자신을 말리지 못했다. 또한 피조물은 박사에게 배반당했음에도 그의 죽은 약혼자를 되살리길 원하는 슬픔을 말리지 못했다. 결국 말릴 수 없는 건 어떤 정의, 통제보다도 더 큰 ‘애정’에 관한 마음이다. 모든 엄격한 규정이 말리지 못한 사랑을 논하기에 규정적이고 논리적인 성격을 가진 ‘말’로서의 대사는 충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작품이 머리보다 마음으로 먼저 닿을 수 있는 ‘움직임’을 극 중 소통 수단으로 사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궁극적 사랑의 양상은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자신을 향힌 조수를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박사는, 어깨를 올리고 앉는 조수에게 어깨를 내린 자세를 유지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직접 어깨를 올리며 조수에게 맞춘다. 엘리자베스를 향한 포옹을 반복적으로 실패하던 피조물은, 엘리자베스의 자세에 맞게 자신의 팔의 각도를 맞춤으로써 비로소 포옹에 성공하게 된다. 신분과 자존심을 넘어 타인을 위해 자신을 움직이는, 사회적 이름을 붙이는 데 사용되던 이성적인 단어들과 문장들로는 형언할 수 없는 교감의 순간이다.

 

공연에서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한 무대를 둘로 나누어 서로 다른 장면을 동시 진행하는 데 있어서는 음향 효과의 제약이 필연적이다. 두 공간의 음향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일부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거나 어색해지는 부분이 보인다. 인물들의 명확하고 과장된 캐릭터성이 주는 웃음은 관객들이 극에 더 즐겁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지만, 가벼운 유머의 너무 잦은 제시는 오히려 메시지와 웃음 사이의 리듬감 조성을 방해하고 관객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제목부터 형식까지, 기묘한 조합들로 이루어진 ‘못 말리는 프랑켄슈타인’ 이라는 피조물은 관객을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게 한다. 낯섦과 이질감에서 시작해 공연에 몰입하고, 서사를 체감하고, 이름다움마저 느끼게 되는 관극 과정은 그 자체로 구분과 선입견을 넘은 이해와 사랑의 경험적 확장이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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