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밤마다 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글 입력 2024.03.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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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기소개를 싫어하게 되었다


 

어느덧 나이를 먹고 보니 푸릇푸릇한 첫인사 따위는 개나 주게 되었다. 새로운 모임에서 만나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저는 OOO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지. 상대방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감도 벅차지만, 어쩐지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기소개가 어째서 싫으냐고 물어오면 답하는 가벼운 핑계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은 따로 있다. 사실 나는 내가 대체 누구인지 한 줌의 확신도 없다.


요즘 그러한 순간이 너무도 잦다. 나는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심지어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와 같이, 말문을 트는 가벼운 질문에도 할 말이 없다면 바보 같은 것일까. 자기 PR은 필수에다 개인 SNS 계정까지 화려하게 장식하며 스스로를 뽐내는 시대에.


처음부터 나도 이런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발단은, 나를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한다.

 

 

 

나를 비워내던 시간


 

나를 잃어버린 시점은 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의 시작점이 언제였는지는 알고 있다. 그 무렵에는 지금까지와 완전히 새로운 무리의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때였는데, 무난하게 그곳에 녹아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 일환으로 나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내 주관과 특징을 하나씩 버리려고 노력했다. 위험하고 불편한 사실을 말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감당하기보다는 해당 상황에서 으레 내뱉곤 하는 말을 따라하곤 했다.


그것이 때로는 일의 효율에 도움이 되었고, 나를 누구나와 큰 어려움 없이 어울리는 붙임성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타인에 대한 아무런 판단도 없이 주어진 듯한 대사를 내뱉을 때면 내가 인간 이하의 멍청이가 된 것도 같았다.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진심이 아닌 말도 스스럼없이 내뱉는, 이른바 심지가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나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 슬프지 않았다. 그 시점의 내게 가장 우선적인 임무는 새로운 조직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내게 아무리 의미 있는 개성이 있더라도, 그것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가득했었다. 독특한 내가 되는 것보다는 평범한 누군가가 되는 편이 상대와 친해지고 나를 설명하기도 쉬우리라 생각했다.

 

 

 

낯선 얼굴의 나를 거울에서 발견할 때


 

그러다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너무나 달라진 스스로를 실감했다. 일기나 소설 등의 글쓰기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어휘력 저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생각과 주관을 담은 글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일기장을 앞에 두고 서두마저 쓰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한 순간, 거대한 추가 가슴을 지긋이 짓눌러왔다. 엄청난 좌절감이 발끝에서부터 나를 잠식하듯 솟아올랐다. 내일이란 없는 듯이, 나의 일상이 무너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답답함에 펜을 내려놓았다.


나에게 글은 지금까지의 나를 설명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자, 나의 유일한 취미였고 자랑거리였다. 사람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면, 나는 글을 잘 쓴다는 것으로 자존감을 지탱해왔다. 우스운 점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나의 글에 큰 관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나조차 제대로 글을 투고해 본 적도 없었지만, 나는 글을 쓰는 내가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문장과 작품들은 수두룩해도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나의 글이었다. 실물로 인쇄된 책이건 컴퓨터 속 파일이건, 형식과 무관하게 나의 글을 펼치면 가슴이 감동으로 차올랐다. 분명 자만이고 과대평가겠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외부의 평가와 무관하게, 사춘기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면의 격동을 받아준 것은 오직 나의 글뿐이었으니까. 부족한 내가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것이 있다면 글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 위안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멍청한 나’로 사는 동안에 내가 좋아하던 나의 모습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고 남들의 생각에 의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다 보니, 대체 무슨 문장을 써야 할지 감조차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나의 자아를 구성하던 핵심이 무너지자, 그 바깥의 모든 것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낭만을 추구하며 감정에 깊게 빠져 쉽게 우울함을 느끼면서도 늘 사소한 행복을 찾을 줄 알던 과거의 내 모습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나의 자아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고 말았다.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빈곤해진 내면을 깨닫자 외로워졌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나의 일상이 상당히 무난해졌다는 것도 알았다.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질문하던 나의 모습 대신, 기계적으로 문장을 읽어가는 내가 있었다. 사람들과 만나 토론을 하면 구성원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주장만을 선택 취사하는 내가 보였다. 정보를 읽고 습득하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의 내면이 궁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바였다. 나의 생각을 쌓지는 않고, 내가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안전하구나’라고 생각한 문장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적당한 패로 사용하곤 했으니까. 진정으로 채우는 것 없이 그럴듯한 이야기만 지껄이는 나의 내면이 풍족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무척이나 허무해졌다. 이십 해를 넘도록 살아오면서 결국 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지식이나 교양은 고사하고, 나의 주장 하나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니. 나의 논리를 조리 있게 펼칠 줄 알던 과거의 나에게 도리어 미안해졌다. 내가 제일 싫은 사람은 자기 주관 없이 남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나도 겨우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 같아서.


말 그대로 자아를 잃어버린 기분에 빠져, 가장 친밀하던 친구가 떠나간 듯 헛헛했다. 지나치게 주장이 강하던 나의 모습이 예전에는 그토록 미웠는데. 나의 생각을 그토록 검열하며 자학하던 탓에 그때의 내가 나비처럼 날아서 떠나가버린 걸까? 밤에 잠자리에 들면, 쓸쓸하게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나의 형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등을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여기에 혼자 남아 일상을 꾸려나가야 할 자신이 두려워서 자주 울었다.


그러나 아침은 나를 독촉하듯 찾아왔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곤욕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자리가 생기면 주눅이 들곤 했다. 텅 비어버린 나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들키게 될까, 아무런 특징도 없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 다시 거짓말을 했다. 있지도 않은 취미를 들먹이거나 과장하여 이야기하면 쉽게 웃을 수 있었지만, 그럴 때일수록 나의 빈곤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매일이 반복될까 두려웠다. 겉만 그럴듯한 인형처럼 살게 될까 좌절했다.


 

 

여전히 해피엔딩은 없다


 

그것을 깨달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부끄러운 결론이다. 드라마나 영화라면 내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해결책을 강구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지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대로이다. 여전히 나의 주관을 세우는 것이 어렵고 마음이 헛헛하다. 늘 멍한 상태로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길 꺼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조금씩 노력하는 매일이다. 습득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재차 의심하며 나의 주관을 세우려고 노력하고, 지어낸 이야기를 해야 할 바엔 침묵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는, 모든 대화의 끝에 내가 느끼는 만족감을 우선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러자 조금씩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해피엔딩은 아니고, 애초에 엔딩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변화하는 존재이며 그때까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니까. 나는 이 과정을 충실히 닦아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노력의 결과로 내가 다시 과거의 나처럼 단단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황의 짧은 글이 어딘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살아가며 어떻게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하며 살 수 있을까? 가끔은 자기가 세운 자신의 모습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을 신성시하는 요즘 시대에 모두가 완전한 나를 확신하며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마무리를 짓고 보니 한편으로는 자기소개치고 밍숭맹숭한 글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자기’ 소개는 없고, 자기가 무너졌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이런 글도 자기소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약간의 수식어를 붙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지금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의 나’를 소개하는 글이라고.


그리고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와 가장 친밀한 친구이던 자아가 떠나가고 혼자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이 우리를 감싸게 되지만, 언젠가 살아가다보면 또 다른 모습을 한 내가 곁에 서 있지 않겠느냐고 얘기하고 싶다. 대신 그 과정에서 무너지지만 말아보자고, 너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말아보자고 담담한 척 속삭이고 싶다.


인생은 길고 우리는 변화한다. 그동안에 우리에게도 언제든 돌풍은 찾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대체 무엇이 남아있을까. 조급함은 버리고 내가 느끼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 매일을 거치고 나면 나의 폐허에도 한 줄기 빛이 내리쬐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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