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갓 죽은 영혼들 사이에 있다가 다리를 절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오르페우스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걸 어기면 끝이다. 두 사람은 짙은 정적 속에서 가파르고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르페우스는 뱀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다. 저승의 신 하데스와 에우메니데스는 이에 감복하여 에우리디케를 저승 세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건다. 바로 지하 세계를 나가는 동안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것.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저승 세계를 거의 다 빠져나갈 무렵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가 걱정 되어 뒤를 돌아보게 되고, 그는 결국 아내를 저승에서 구해내지 못하게 된다.
왜 오르페우스는 그 마지막 순간 에우리디케를 돌아본 걸까. 그 ‘돌아봄’의 의미에 대해 영화 속 세 여자는 논쟁한다. 소피는 오르페우스의 돌아봄을 비난하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돌아봄을 이해한다. 이성이 아닌 사랑의 충동 때문에 금기를 위반한 것은 용인될 수 없다는 일반의 감상과 그녀와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에 감동한 예술가의 감상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재해석하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핵심은 엘로아즈의 답변과 관련이 있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
오르페우스 신화는 지극히 오르페우스의 관점에 맞춰진 이야기다.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잃고, 노래로 저승 세계의 신들을 감복시키고, 아내를 구하고, 그렇게 구해낸 아내를 또다시 죽이게 되는 그 일련의 과정 동안 에우리디케. 그녀는 무엇을 했는가? 자기 자신의 운명이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동안, 그녀는 어떤 저항도 없이 그저 자신에게 ‘내려질’ 운명만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는가? 엘로아즈의 목소리를 빌려, 영화는 오르페우스의 ‘돌아봄’이 에우리디케의 지시에 의한 결과라고 말한다.
선택하는 주체 에우리디케와 선택당하는 객체 오르페우스. 완벽한 전복이자 새로운 신화의 호명이다. 그것은 영화가 이제껏 논의되지 않았던 자리의 이야기를 펼칠 것에 대한 선언과도 같다. 영화는 그 어떤 목소리도, 주체성도 없이 그저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전 신화 안의 여성의 자리를 다시 바라봄과 동시에 18세기의 유럽, 부르고뉴의 외딴 성의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에 주목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탁월한 점은 이곳에 있다. 그들은 여성에게 주어졌던 틀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고자 골몰하지 않는다. 그저 그 주어진 삶 안에서, 직접 호흡하고, 살아내고, 행위 하는 여성을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뿐이다.
화가 마리안느는 결혼을 앞둔 귀족의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가 살고 있는 부르고뉴의 한 외딴 성으로 향한다. 언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언니의 결혼 상대를 ‘물려받은’ 엘로이즈는 결혼 상대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 협조하지 않고,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아닌 산책 친구로 위장하여 그 의도를 숨기고 엘로이즈와 시간을 보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산책하며 집요한 화가의 시선으로 초상화의 ‘모델’인 그녀를 관찰하고, 상상하여 그림을 완성한다.
마침내 초상화가 완성된 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완성된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녀에게 보여준다.
“나예요?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어요.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
화가와 모델, 권력의 구분이 명확한 그 관계에서 엘로이즈는 언제나 그가 해석한 에우리디케처럼 말해버리고 만다. 그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결혼 상대에게 전해질 자신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서도 마리안느가 바라보고 그려낸 자기 모습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저 누군가를 관찰하고, 상상한 결과로 생명이 있는 그림을 그릴 순 없을 터.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그린 초상화에 실망하고, 이곳엔 생명력도 존재감도 없다는 감상을 남긴다.
마리안느는 분노하지만 한편 그 혹평을 이해한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안느가 그린 첫 번째 초상화엔 생명과 존재가 아닌 관습과 제도, 권력이 담겨있었다는 것을. 그 당시, 남성의 간택을 받아 결혼이라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려진 여성의 초상화엔 예술의 생명성보다 더 거대하고 치졸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 노골적인 목적 뒤에 숨어 편리하게 상상하고, 편리하게 관찰했던 마리안느는 곱게 그려진 엘로이즈의 얼굴을 직접 뭉개버린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든다. 이번엔 적극적인 모델을 앞에 두고서.
이제부터 초상화는 이들로 인해 새롭게 정의된다. 결혼이라는 목적을 위해 ‘팔릴’ 초상화가 아닌, 현재의 시간을 찬찬히 살피고, 쌓고, 응시하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이 담긴 채 그려질, 생명과 존재의 본질로. 소유할 수 없는 불과 같은 생명을 소유하고자 했던 기성의 초상화는 두 여성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의 탈바꿈을 맞이한다.
모델의 자리에서 화가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 내야 하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엘로이즈는 그를 직접 모델의 자리로 불러들이곤 말한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의 자리로 가자 비로소 보이는 자신의 자리에 마리안느는 당황하고, 또 벅찬 듯 깨닫는다. 아주 평등한 위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수없이 교차한다. 두 시선 안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아주 면밀히 살핀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그 수평의 공간에서야만 비로소 서로의 본질이 보이고, 사랑이 싹튼다.
그러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집을 비우고 성에는 하녀 소피, 엘로이즈, 그리고 마리안느 세 명만이 남게 된다. 어머니가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은 5일 뒤. 5일이라는 시간 동안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완성해야 하고, 그것은 곧 그들이 함께할 시간이 5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주 짧은 자유의 시간을 부여받은 그들은 그 시간을 만끽하기로 한다. 목적 없는 응시, 목적 없는 그림, 목적 없는 웃음. 그들은 자유로운 5일의 시간을 보내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마침내 이별하게 된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본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엘로이즈는 밀라노에 사는 이름 모를 남성과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으며, 마리안느는 그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직접 그려주었으니 말이다. 이들의 사랑은 쟁취되지 않았고, 틀을 깨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여운은 계속하여 지속된다. 예정된 미래를 앞두고 그들은 서로를 기억하는 것을 택한다. 쟁취하고, 전복하고, 압도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잔잔히 온기를 머금은 추억으로.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도 같다.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기괴한 웃음이 가득한 해피엔딩 보다 초상화를 그리듯 아주 천천히, 세밀하게 상대를 응시하고 그 모습들을 기억하며 헤어지는 편이 더 진실되지 않는가. 관계의 영원보다 순간의 지속을 신뢰하는 그들의 사랑은 진실된 채로 존재한다.
그 자체로 불꽃이다. 생명과 본질에 대한 순수에서 시작한 불꽃은 점점 커지다가,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은은한 불씨로 변한다. 절대 꺼지지 않은 그들의 추억과도 닮은 불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