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재난을 연극으로 담아내기 - 태양극단 '제방의 북소리' [공연]

동서양과 온 오프라인의 의미 있는 조화
글 입력 2024.03.1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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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는 동양풍의 거대한 인형들이 있고, 얼굴 위에 검은 천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 인형의 움직임을 조종하고 있다. 얼굴의 윤곽만이 검은 천 아래 간신히 드러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인형을 조종하는 과정이 그대로 무대 위에 드러난다. 그러다 인형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순간, 무대 위 인형들이 사실 고도로 양식화된 움직임을 선보이는 배우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1999년 프랑스에서 초연되고, 2001년 한국에서도 공연된 프랑스 태양극단의 <제방의 북소리>는 일명 ‘배우가 연기하는 인형극’이다. 공연은 순간의 예술인지라, 지금 <제방의 북소리>를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은 연출가인 아리안 므누슈킨의 감독 하에 촬영된 영상을 통해서이다.

 

 

제방의 북소리 포스터.jpg

 

 


전 세계를 넘어 '지금'까지


 

영상에는 공연장에서 직접 볼 수 없는 모습들이 담겨 있다. 인형들의 동작과 입술 움직임에 맞춰 그 인형의 대사를 하는 무대 밖의 별도의 배우들이 화면에 비춰진다. 연주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형들이 연주하는 악기들의 실제 소리를 내는 무대 밖의 악사들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말과 움직임, 음악이라는 요소들을 각각 떼어놓고 그것들이 각 장면마다 어떻게 발생하는지 무대 바깥까지 의도적으로 클로즈업 해 보여주는 이러한 편집은, 극적 환상을 일으키는 연극 결과물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 원리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 엘렌 식수는 1998년 중국에서 일어난 대홍수를 모티브로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은 한국의 사물놀이, 일본의 분라쿠, 그 외에도 아시아의 다양한 의복과 예술 양식을 흡수한 채 작품 속 사건이 발생하는 명확한 장소의 제시를 흐리고 있다. 아시아 문화권 안에서 뿐만이 아니다. 동양인의 모습을 한 인형의 대사들은 프랑스어로 발화되며, 국적의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흐리고 있다. 작품 속의 재난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품은 영상으로 남아 2024년 현재에도 어디에선가 상영되고 있다. 지나간 작품의 흔적을 현재에 다시 보는 것은 시간의 경계를 넘어 오늘날 또 다른 형태의 재난을 마주하고 있는 전 세계에 닿는다. 그렇게 작품은 재난 속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오늘날의 고민과도 맞닿을 수 있다.

 

 

제방의 북소리 공연사진.jpg

ⓒ Michéle Laurent

 

 

 

인형으로 은유되는 예술


 

극에는 두 가지 층위의 예술이 존재한다. 일차적으로 <제방의 북소리>라는 연극 그 자체이고, 또 하나는 주인공 듀안이 서민들에게 홍수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사물놀이를 하는 것과 같이, 연극 속 장면에 속한 예술이다. 작품은 극중 연극 창작자와 진행자의 직업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퍼피티어(인형극 예술가), 바이 주를 명확하게 등장시킴으로써 인물들의 정서에 몰입하기보다는 연극이라는 예술 자체의 형성과 역할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한다.

 

작품은 ‘인형’의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인형으로 분해 연기한다는 것 자체는 극중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예술의 양상에 있어서도 강렬한 은유로 작용한다. 큰 홍수가 예견된 가운데, 고위 관료들이 산의 나무들을 베어버린 탓에 도시는 수몰될 위기에 놓인다. 황제와 고위 관료들은 그들의 명예의 증거들과 재산이 있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 쪽의 댐을 열기로 한다. 그리고 듀안과 그의 뜻을 같이 하는 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북을 치고, 댐을 여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어진 선택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부와 명예를 지켜낼 수 있는 선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황제와 고위 관료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진 '권위'에 의해 조종당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들은 마치 검은 천을 뒤집어 쓴 사람들에 의해 조종당하는 인형같이 느껴진다. 듀안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마담 리와 같은 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결정한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 고위 관료의 결정에 삶이 통제되고 만다. 위계에 의해 인형처럼 조종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지위가 높든 낮든, 이들 모두가 홍수에 대항하여 싸울 수는 없다.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두가 자연 앞에서는 행위가 제한되고 통제되는 인형인 셈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강' 역할 역시 한 명의 '사람'으로 형상화되며, 인형으로 분한 사람이 연기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강은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강의 탓으로 돌리기에’ 분노한다고. 결국 강의 범람 앞에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제한시킨 것은, 깊은 고민 없이 나무를 전부 베어버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의 이기심이라는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사회의 신분 체계 역시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던가. 이 모든 수몰의 비극은 강이라는 자연물 자체가 아니라 강이 그러한 역할을 하게 몰고 간 '사람'들인 것이다. 그 점에서 사람의 인형을 사람이 조종하며 그 행위를 통제하는 극의 형식은 극 전반을 아우르는 은유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것 하나는, 앞서 기술한 모든 내용이 인형을 통한 '은유'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인형들의 과장된 말투와 양식화 된 움직임은 이것이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일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연극은 '현실 그대로'가 아니다. 대부분의 예술작품에서 실제 현실 속의 사람들인 예술가들의 얼굴은 어렴풋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작품에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가상세계 속 그들의 페르소나이다. 무대 위 인형을 조종하는 조종사들의 얼굴이 검은 천 아래 실루엣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이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겠다. 연극은 실제 현실 그 자체가 아니기에 연극을 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직접적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예술의 실연이 드러나는 부분은 듀안과 동료들이 홍수에 따라 대피해야 할 방향을 알려주기 위한 사물놀이 시범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듀안의 병력을 강화시키거나, 댐을 열지 못하게 하거나, 홍수를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위험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위기를 직시하게 하고, 재난을 경고하며 새로이 움직일 기회를 준다.

 

 

 

이후의 그 이후


 

연극은 실제 현실의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 실제 홍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그 홍수에 대한 연극의 진행이 동시에 일어나도록 일치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엘렌 식수가 이 작품의 희곡을 쓴 시점도 모티브가 된 홍수가 발생한 이후이다. 연극은 어떻게 보면 이처럼 ‘이후’의 재현이다. 따라서 연극이 실제 모티브가 된 상황을 바꿔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하고, 보는 시점에 따라 사건을 달리 해석할 가능성을 제공하며, 관객이 사건의 인지를 바탕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할 수는 있다.

 

극의 마지막 장면, 홍수는 결국 지역을 덮치고 앞서 제시된 인물들은 모든 죽음을 맞이한다. 무대에 차오른 물로 희생자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표현하는 작은 크기의 인형들이 내던져진다. 이전까지는 사람이 연기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던 인형은 마지막 장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작은 크기의 실제 ‘인형’으로 표현되며, 천 등의 오브제를 이용해 연극적으로 표현되던 물은 그때서야 실제 물로 제시된다.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제시된 배경 속에서 예술가에 해당되는 퍼피티어 바이 주는 그 인형들을 그저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나하나 건져 올린다. 인형의 겉모습으로 비유된 통제된 삶 아래에서도 자신의 움직임과 행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실제 ‘인형’이라는 ‘예술작품’으로 세상에 남아 이들을 건져올린 예술가에 의해 세상에 남아 기억되게 된다.

 

<제방의 북소리> 역시 그렇다. 원래 있던 홍수와, 엘렌 식수와 아리안 므누슈킨이 보는 세상의 사람들은 연극이라는 ‘사건 이후의 사건’을 통해 기억되었다. 이는 다양한 문화권의 삶과 결합되며 한 지역의 객관적인 사건 이상의 널리 공유되는 사건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연극이라는 사건은 또다시 영상으로 기록되며 공연이 제작되는 방식을 한번 더 재해석해 ‘이후 그 이후의’ 예술 기록물이 되었다. 이는 홍수라는 사건 이후의 연극을 넘어 오늘날 새로운 재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또다시 재해석되면서 ‘이후 그 이후의 연극’으로 동시대의 의미를 찾아나간다. 영상이라는 더 많은 시공간의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는 형식과 함께. 2024년 한국에서 이 작품의 영상 기록물을 보고 있는 필자로서, 작품에서 엿본 예술의 역할이 짧지 않은 시간을 거쳐서도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음을 느낀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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