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믿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는 -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 제8회 정기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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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어느 멋진 날에
바다를 건너 저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5월은 참으로 축복스러운 달인 것 같다. 겨울의 여운도 마침내 누그러진 따스한 날씨와 더불어 온갖 행복한 기념일로 가득 차서 그야말로 매주 즐거운 행사가 베풀어진다. 그러한 5월에 붙여진 여러 수식어 중 하나는 ’가족의 달‘이다.
따스한 봄날, 가족의 달을 맞이하여 서울 남산 언덕배기 즈음에 자리한 국립극장에서 지난 12일,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의 제5회 정기연주회, ’가정의 달 콘서트 5월愛‘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대의 금관악기 앙상블인 코리안 트럼펫터 앙상블은 전문 연주자부터 순수 아마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과 연령대, 지역 출신의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이번에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성악가 김동규와 트럼펫계에서 열렬한 관심을 받고 있는 신예 손장원이 함께하여 더욱 풍성한 무대가 준비되었다.
본 공연의 흥미로운 점은 트럼펫터들이 중심이 되는 오케스트라라는 것이다. 필자에게 트럼펫이란 그 웅장한 사운드에 걸맞게 행진이나 행렬의 선두에 서서 큰 소리를 울리며 공기를 압도하고 감정을 선동하는 용도의 악기라는 인상이 강했다. 트럼펫을 떠올리면 몸을 잔뜩 부풀리고 가슴과 어깨를 내민 채, 으스대고 우쭐거리며 기세등등하게 나서는 사람의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그런 이유로 뿌뿌 소리치는 트럼펫의 사운드로 다양한 선율을 표현할 수 있을지, 함께하는 다른 악기와의 조화가 감동을 줄 수 있을지 의심을 품었다. 아름다운 날, 근사한 국립극장에의 방문이 감동으로 마무리 맺을 수 있을지 우려를 담고 공연장으로 입성했다.
12개의 곡, 무한한 아름다움
공연은 프로그램에 포함된 정식 곡 9개와 앵콜곡 3개로 구성되었다. 모든 곡이 트럼펫의 매력을 뽐내는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 가운데 3곡을 꼽아 감상을 공유한다.
[1] < Fantaisie Brillante >
, J.B.Arban - 곡이 시작하기 전, 지휘자와 함께 신예 트럼펫터 손장원이 등장했다. 그는 지휘자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연주자의 입가로 트럼펫 주둥이가 향하고 그의 리드와 함께 곡이 시작되었다.그야말로 <찬란한 환상곡>이라는 제목과 딱 맞아떨어지는 곡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능글맞은 사운드로 시작된 곡은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들판으로 관객을 이끌었다. 마치 누군가가 잔디밭에 몸을 기대고 누워 이쪽을 향해 같이 앉아 쉬자고 유혹하는 듯, 봄 특유의 여유롭고 능글맞은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따스한 바람이 산들산들 춤을 추는 가운데 유유자적 한가하지만, 조금은 얄미운 듯한 얼굴의 봄이 관객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동시에 트럼펫의 웅장한 질주와 함께, 더욱 힘차게 박차를 가해 달려 나가는 봄의 강렬한 생명력이 푸릇푸릇 돋아나고 있었다.
이러한 인상의 사운드를 뿜어내며 금빛으로 반짝이는 트럼펫은 분명 5월과 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악기일 것이다. 트럼펫의 그 반짝이는 역동성은 봄의 그것과 무척 닮았고, 경쾌하면서도 웅장하고 깊숙한 사운드는 봄 특유의 발랄함과 무척이나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트럼펫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환상곡>은 우리가 봄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2] <봄처녀>, 홍난파 &
< Core n'grato >, S. Cardillo - 이번 무대는 성악가 김동규와 함께했다. 관객석에서 터져 나온 열렬한 환호와 함께 그가 무대에 올랐다. 첫 곡은 <봄처녀>였다. 이은상의 시조를 가사로 삼아 만들어진 1932년의 곡은 성악가의 목소리를 타고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지금껏 곡의 진행을 이끌던 주인공 트럼펫은 잠시 물러나서 성악가의 노래를 뒷받침해주었다. 트럼펫의 진중한 사운드와 성악가의 목소리가 합쳐져 따스한 바람을 불러들이는 <봄처녀>가 만들어졌다. 곡이 진행됨에 따라 공연장에 분홍색 음악이 나선형으로 피어오르며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듯했다.다음 곡은 < Core n'grato >
, ‘무정한 마음’이라는 곡으로, 사랑을 얻지 못한 사내의 비탄을 담은 곡이었다. 그에 걸맞게 곡은 한층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질렀다. 거절당한 사내의 감정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울부짖듯, 사내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듯 트럼펫이 휘몰아쳤다. 그 곁에서 성악가는 바리톤의 묵직한 매력을 뽐내며 모든 것을 바치듯 울부짖으며 노래했다. 모든 소리가 어우러져 사내의 감정이 음악으로 구현되어 펼쳐졌다. 그러한 음악의 휘몰아침 속에서, 필자 또한 사랑에 버림받은 사내가 된 듯 감정을 이입하며 감상하게 되었다.
트럼펫의 여러 얼굴
공연을 보면서 필자를 놀라게 한 점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모든 곡에서 공통된 점은 기존 필자가 지녔던 편견을 보란 듯 깨부수는 트럼펫의 자유자재함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에게 트럼펫이란 우쭐대고 으스대는 멋쟁이 악기에 불과했다. 조용한 가운데 홀로 고동치며 분위기를 장악하거나 곡의 중간중간 양념처럼 맛을 더해주듯이, 트럼펫은 다른 악기와 어울릴 수 없는 강렬함만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트럼펫을 마주한 경험의 결여로 인한 오해에 불과했다.
트럼펫은 단지 소리만 큰 악기가 아니었다. 특유의 풍부하고 진중한 음과 더불어 경쾌하고 재간둥이 같은 음까지 소화하는 등, 여러 음역을 노래하고 수많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다채로운 악기였다. 그것은 때때로 위압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동시에 자유자재로 다양한 음을 만들어냄으로써 다른 악기와도 적절히 어우러질 수 있었다.
동시에 트럼펫은 각자의 마음속에 잠들어있는 정서를 일깨우는 악기였다. 특유의 풍부한 소리는 어떠한 이야기를 담고 온다. 그 소리는 어떠한 장면 또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트럼펫터 오케스트라는 더욱 풍요로운 감상과 벅찬 감동을 준 것이다.
트럼펫터 + 오케스트라 = !
그야말로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앵콜곡마저 끝이 나자, 박수가 한 차례 터져 나왔다. 앵콜곡의 여운과 함께 관객들의 박수 열기가 공연장을 메웠다. 박수가 잦아들고 지휘자가 파트별로 연주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파트별로 5~6명 정도 되는 연주자들이 일어나 박수를 받았다. 지금껏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무표정한 얼굴에서부터 홀가분하다는 미소가 퍼졌다. 관객들과 더불어 지휘자는 두 손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나머지 단원들은 악기를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동료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파트가 많은 만큼 그러한 기립과 박수가 수차례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지치지 않았다. 단원들의 얼굴과 자세에서 뿌듯함의 여운이 물씬 느껴졌다.
필자 또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박수를 보내던 가운데, 같은 순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느끼고 있을 열기를 상상해보았다. 모두가 밀착되어 붙어있어 땀이 흐를 만큼 덥지만, 함께 해냈다는 마음으로 은은한 미소가 지어지는 모습. 그런 모습을 상상하자, 오케스트라의 진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너의 독주일 땐 우리 모두가 너를 믿고, 함께할 때는 우리 모두의 조화를 믿는 것. 두 손으로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 악기를 쥐지 않은 나머지 한 손까지도 바쳐서 동료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 공연이 마치면 그제야 마음 놓고 발그레 볼을 올려 웃으며 우리가 함께임을 느끼는 것. 그들은 음악을 통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힘을 받고 다시 또 보탠다. 그것은 상당한 난이도의 스킬과 촘촘한 리듬감으로 휘몰아친 앵콜곡에서 더욱 빛을 발한 참이었다. 서로를 믿지 않으면 이 어려운 곡을 해낼 수 없고, 하물며 트럼펫에 숨을 불어넣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함께였고, 서로를 믿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이 보이는 미소는 이러한 이유로 더욱 감동이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진짜라고 말했다. 음악은 손으로 붙잡거나 종이에 기록할 수도 없는 무형의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면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단원들 각자가 제자리에서 소리를 내줄 것을 믿어야 하고, 관객들이 그들의 음악의 가치를 믿어야 한다. 음악이 그곳에 존재했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오직 현장에 있는 자들뿐이다. 그러므로 음악의 존재는 서로의 믿음을 다시금 일깨우고 오롯한 헌신을 요구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것을 해냈다. 그들은 믿고 헌신했고 마침내 이루어냈다. 순간 고막을 스치고 사라질 음악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음악을 매개로 기꺼이 모이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그 어려운 것을 지속해 옴으로써 공연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단원들 간 서로를 향한 박수와 미소를 기억하며 늦은 박수를 보낸다.
[서지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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