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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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오시비엥침까지
폴란드 여행을 결심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으로부터 시작됐다. 우연히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항공권 할인 특가를 보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와 폴란드의 유일한 접점이라고는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추일 서정>의 시구를 읽으며 갸우뚱했던 경험뿐이었다. 때문에 구체적인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던 중, 친구로부터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고 전해 들었고,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무리해서라도 방문 일정을 끼워 넣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견학하기 위해서 예약은 필수이다. 이른 아침 또는 마감 직전에는 무료 입장이 가능하지만, 그 외 시간대에는 가이드와 동행해야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예약 방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안내하는 바를 따르면 되는데, 시간적 여유를 두고 미리 신청할 것을 추천한다. 3일 전에 신청하려 보니 영어 가이드는 만석이었고, 겨우겨우 폴란드어 가이드라도 신청해 예약에 성공했다.
내가 끊은 비행기 티켓은 크라쿠프가 아닌 바르샤바행이었다. 바르샤바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크라쿠프까지는 버스를 타고 약 세 시간 이동해야 했으며, 크라쿠프에서 다시 오시비엥침으로 가는 미니 버스를 타야 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식 발음이고, 폴란드식으로는 오시비엥침으로 읽는다. 오비시엥침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산 속 돌길의 연속이었다. 이대로라면 멀미로 쓰러지겠다 싶을 때쯤 버스는 멈춰 섰고, 역사 교과서와 책에서 그 이름만 수없이 들었던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기
입구는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내부 서점에서 한국어로 된 안내 책자를 구매하고 높은 벽을 따라 걸으며 본격적인 수용소 견학을 시작했다. 11월 중순 폴란드 날씨를 과소평가했던 건지, 그날은 유독 추웠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떨어지면서, 한층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수용소를 탐방하게 되었다. 여행에서, 꼭 예쁘지 않더라도 기록을 위해 사소한 것들도 모두 사진으로 남겨 두는 편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몇 번 사진을 찍다가도 이내 카메라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만큼 수용소의 모습에 압도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용소 건물들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전시관으로 구성되었다. 전시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안타까운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니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한 전시실에는 수용소 유대인들이 쓰던 안경, 가발,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여 삼면의 벽을 모두 메우고 있었다. 나치는 패배를 직감한 뒤 증거를 인멸하고자 이것들을 모두 버리려 했다는데,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격이다.
다른 전시실에는 희생자 사진과 인적 사항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벽의 끝에서 끝까지 빈틈없이 액자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희생자들의 극소수였다는 점이 충격적이었다. 여성은 대부분 무직이었고, 남성들도 농부나 수선공 등 평범한 중산층이 가장 많았다. 무엇보다도 수감 후 생존 기간이 몇 달 남짓으로 매우 짧았다는 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끔찍한 나치의 만행은, 일일이 서술하기도 어려울 만큼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살인 주사를 놓던 수술실, 수감자들을 야외에 매달아 놓던 장대, 숙소 바로 앞에 설치된 총살 집행 장소인 ‘죽음의 벽’ 등, 견학 내내 마음속에 슬픔과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아팠던 공간은 실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었던 가스실이었다. 입구부터 무척 어둡고 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부는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과 가스가 새어나오는 배관이 전부였다. 고개를 돌려 벽을 보니, 벽에 셀 수 없이 많은 손톱자국이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겨진 후손들의 몫
이토록 끔찍한 폭력의 역사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행사하는 억압과 폭력은 끝도 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본 끔찍한 광경들은, 종종 일제 강점기에 자행되었던 범죄들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한국 역시 식민지의 안타까운 역사를 지닌 국가이며, 그런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수용소에서 본 광경들이 더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해 지속적인 반성의 태도를 보인 독일과 달리, 한국과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의 풀리지 않은 매듭 앞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일련의 외교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일제가 자행했던 식민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왔다. 또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과거사에 대해 자신들이 사과하는 건 과도하다 주장하기도 한다.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과연 선조들이 저지른 끔찍한 역사를 직면하는 후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다.
- 엘리 위젤
제노사이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끔찍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억을 억누르고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종으로서 마주하는 가장 큰 위험이다.
우리가 온전히 인간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다만 과거를 마주하고, 기억하며, 배우고, 그리고 배운 점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
- 정의로운 사람들의 재단(Righteous Persons Foundations)
수용소 입구에 있는 비석에 적힌 문구들이다. 이들은 강조한다. 피하지 말고 직면할 것을, 배우고 기억할 것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오며, 오는 길에 같은 버스에 탔던 두 남자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돌아가는 버스가 예정된 시각에도 오지 않아 추위에 떨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들은 나와 친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같은 질문에 자신들은 독일에서 왔다고 답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견학하는 독일인의 모습이 왠지 생경했다. 그런데, 실제로 독일에서는 매년 수많은 학생과 방문객이 나치 수용소를 견학한다. 게다가 독일의 많은 주는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수용소 견학을 필수로 의무화하여 시행 중이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독일인들을 보며, 조상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현세대가 수행해야 하는 책임은 바로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본의 외교 방향성에 회의적인 이유는, 단순히 말로써 사과하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명백히 발생했던 역사를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는 태도 때문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과하고 정책으로서 책임지는 건 정치인들의 일이라지만, 역사를 직면하고 배우는 건 모두의 몫이다. 정확히 앎으로써 대대로 이어지는 교육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남겨진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 모두의 몫
이처럼, 교육은 책임이자 추모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특정한 국가들만 지는 게 아니다. 역사는 입체적이기에, 그 어떤 나라도 모든 시대적 맥락에서 완전한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부여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탈식민주의를 배우면서 각자 자국의 식민지 또는 식민 지배의 역사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놀랍게도,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 약 10명 중 나만이 유일하게 과거 식민지를 경험했던 국가 출신이었다. 그들 앞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설명하기란 어렵고도 막막한 일이었으며, 왠지 피해자 국가라는 명패를 달고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한국이 과연 ‘피해자 국가’라고만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부당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는 일은 수도 없이 반복 되어왔다. 그러니 적어도 어떤 시점에서는, 한국 역시 역사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베트남 한국군 ‘위안부’를 만들었던 역사는, 한국 역시 책임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한다. 나 역시도 남겨진 후손으로서 직면하고 배우고 기억할, 교육의 책임을 지고 있던 것이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뉴스에서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한 민간인 살상 범죄가 보도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과거의 잔해도, 뉴스에서 보이는 현실의 풍경도 모두 두말할 것 없이 끔찍했다. 세계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싶다가도,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만큼이나, 역사 교육이 중요하지 않은 시기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계속 배워야 한다.
[김채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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