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짬뽕' - 춘래원 주인장 신작로 전상서

글 입력 2024.05.1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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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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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대학로에서 공연되었다는 연극 '짬뽕'을 만나고 왔다. 10년, 20년 시간의 힘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무엇이든지 10년을 넘으면 가벼이 볼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요즘 받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5.18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표현했을지도 미리 상상해 봤다.


평일 저녁 예상보다 빠듯한 동선으로 우다다 달려서 도착한 공연장. 사람들이 가득했다. '짬뽕'의 공연장에서는 이래저래 속으로 놀라운 부분이 많았다. 매표소에서는 추억의 뽑기가 있었다. 두 번의 기회를 5등으로 뽑고 나니 작은 달다구리를 건네받았다. 다음으로 신기했던 건 연극 시작 직전이었다. 갑자기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배우분이 짜장면과 짬뽕을 좋아하시는 분을 물어온 것도 신기하고, 번쩍 손을 든 사람들도 신기했고, 그렇게 뽑힌 두 분이 무대에서 정말 짜장면과 짬뽕 한 그릇을 받아서 드시고 있었고, 관객이 손님으로 등장해서 간단하게 대사(?)까지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시간 상 짜장면과 짬뽕을 많이 드시지는 못하긴 했지만, 그분들에게도, 함께 공연을 본 분들에게도 신기한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거 인심 좋은 중국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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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신작로가 지은 중국집의 이름은 '춘래원'. 내 인생에도 봄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그에겐 큰 욕심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돈을 조금 더 모아 사랑하는 미란이와 결혼하고, 여동생 지나와 식구 같은 배달원 만식이 녀석과 이렇게 넷이 오붓하게 지내는 것뿐이다. 부모님을 잃은 순이에게 짜장면도 한 그릇 주고 바쁘게 운영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다만 별일 없이 살고 싶은 게 큰 욕심인 시절이었던 게 문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물어보면 이들 중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만식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마침 TV에서는 알쏭달쏭한 뉴스가 나왔다. 만식이는 늦은 밤 배달할 음식을 군인들에게 뺏기고 돌아왔는데, 뉴스에서는 간첩들이 배달 철가방을 이용한다고 한다. 만식이를 너무나 잘 아는 작로와 지나가 잠시 의뭉스러워하는 것도 그렇지만, 간첩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려고 해도 의심받을 수 있다니 억울할 수밖에. 목격자가 없어서 답답하겠지만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TV가 이상하더니 전화가 잘되지 않기 시작한다. 학생들만의 시위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연기는 거세지고 총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시위를 하는 학생들은 결의에 차 있지만 또 사랑도 하고 싶은 대학생들이다. 미팅을 가려던 학생은 치마가 잔뜩 찢어지고 군인이 가슴을 만졌다고도 한다.


한편 춘래원을 찾은 군인들. 처음에 배달할 음식을 빼앗아간 장본인은 그저 영문도 모르는 방위였다. 그들은 군복을 입어 사람들에게도 쫓기고 배는 고프다. 우스꽝스럽게 헐렁한 치마를 입고 그들도 거리고 나갔다. 작로가 사랑하는 미란이는 시청 근처로 나갔다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상태로 숨을 거뒀다. 길을 나선 만식이와 그를 말리러 나간 지나도 돌아올 수 없었다.


연극을 보다가 드라마 '연인'이 떠올랐다. 길채가 바라던 일이 생각났다. 연모하는 이와 더불어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냇물에 발 담그기, 가을에 담근 머루주를 겨울에 꺼내 마시면서 함께 늙어가는 일. 그렇게 평온하게 살고 싶었던 길채는 전쟁으로 고향 능군리를 뒤로하고 도망치고,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도 하고, 대장간을 운영하며 돈도 열심히 벌고, 납치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능군리로 돌아왔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도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강했던 길채는 사랑하는 장현과 돌고 돌아 만났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참 오랜 시간이 걸린 결말은 반드시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여러 번의 운도 따랐다. 그들을 구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삶의 의지를 잃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다.


춘래원의 식구들이 바라던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길채와 작로는 다르다. 춘래원의 사람들이 겪은 것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을 열심히 모았지만, 사랑하던 이들은 그의 곁에 없다. 봄에 꽃구경하러 간 소풍에서 찍은 사진은 그들의 영정사진이 되어버렸다.

 

길채를 힘들게 했던 것 중엔 같은 조선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갖은 고초를 겪고 포로에서 벗어난 그녀를 기다린 것은 욕을 당한, 절을 잃을 여자라는 눈초리와 뒷말이었다. 남편과도 헤어졌고 가족들 곁 또한 떠나서 살아갔다. 작로가 아마 그날 이후 마음이 더 아픈 순간이 있었다면 그날을 겪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지분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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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배우다 보면 차라리 아주 먼 옛날,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을 배울 때는 몰랐던 감정이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나타난다. 이렇게 성장하고 싸우고 쇠락해 가는지를 이해하다가 근현대로 오면 부끄럽고 아프고 아찔한 순간이 점점 많아진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강렬해서 떠올리기도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이 많다. 1970년대부터 슬슬 매콤해지던 짬뽕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 1980~90년대. 연극 '짬뽕'은 그 시대를 마음이 턱 막힐 정도로 그려내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춘래원에 바라던 봄이 왔다면 작로는 미란과 금반지를 나뉘어 끼고, 지나는 씩씩한 걸음으로 만식이와 남산을 구경 갔을 것이다. 그 봄을 영영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해마다 미란이, 지나, 만식이를 기억하며 봄을 보낸 작로를 안아주고 싶다. 안아줘야 하고 말고. 많이 아팠을 텐데 말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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