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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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밖으로 내몰리는 '난민화되는 삶',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이방인의 수용 문제를 읽다
지금 여기, 콜로노스는 가능할까 - 그리스 비극에서 묘사된 아테네에 있는 콜로노스는 신들의 땅이므로 신성하고 아름답다. 그곳은 근친상간과 부친살해를 저지른 오이디푸스 같은 오염된 자가 감히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이 콜로노스이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불경함도, 어지러움도 없는.
그래서 이방인이 그 땅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모를 긴장을 느낀다. 일순 그를 위협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삶을 위해서다. 새로운 꿈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콜로노스는 지금 가능할까.
자기증명, 오이디푸스 되기는 가능한가 -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함과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은 신에 의해 이미 전제되어 있던 것이므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설득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난민과 미등록 이주 노동자는 이런 기회를 충분히 갖기가 쉽지 않다. 의혹과 의심이 전제된 수많은 질문 앞에서 몸과 마음이 쪼그라든다.
난민심사, 오독과 오해가 없는 대화는 가능한가 - 난민 심사에 있어 언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통역과 번역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경우 대화는 위험해진다. 오이디푸스와 아테네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문제는 훨씬 복잡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설명해야 할 사람이 만약 저항의 침묵으로 버틴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것이다.
수용시민 되기, 테세우스 되기는 가능한가 - 아테네의 시민들은 처음에 오이디푸스의 수용을 강력하게 불허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듣는다. 들음으로써 이해와 수용을 위해 한 발짝 나아간다. 테세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아테네의 정치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20세기 말 많은 나라들이 이제 우리도 그만한 국가가 되었다는 제스처를 보여주기 위해 난민과 이주 정책을 펼쳐 보였지만 정치적 계산이 쉽게 이를 뒤엎고 만다. 그리고 점점 더 퇴보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수용시민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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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 이곳은 그리스 비극 속의 '아테네', 될 수 없는 세계 여러 나라 중 한 곳이다. 등장인물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를 뿐, 모두 미등록(undocumented) 체류자이다. 그들은 결코 '콜로노스'가 될 수 없는 출입국사무소 내에 있는 외국인 감호소에서 추방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 국적도 사연도 다르지만 모두가 오이디푸스가 되며 때로는 안티고네와 크레온, 테세우스가 된다. 그리스 비극 속 인물들의 극적 행동이 등장인물들의 서사에서 산발적이고 비유적으로 드러난다.
[극단 코끼리만보]는 2007년 첫 걸음을 시작한 공동창작집단입니다. 우리들은 '극장'이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극장은 총체적 삶이 다시 일어나는 시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은유와 상상의 힘으로. 그 총체적 삶 안에는 낯선 공포, 고통, 행복, 현재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다는 깨달음, 그리고 현재를 넘어선 세계를 인지하는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극단 코끼리만보]는 연극이, 극장이 그런 낯섦과 일상 사이의 소통과 긴장을 제공하기를 소망합니다. 코끼리처럼 묵직하고, 느리게. 그러다 어느 순간, 속도와 무게를 상상의 힘으로 털고, 나는 코끼리처럼.
[박형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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