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고전에서 오늘을 발견하다 - '고목' 전인철 연출

글 입력 2024.03.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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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돌파구] 연극 고목_포스터 1.PNG

 

 

나무 한 그루가 고목이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 사회는 지난 시간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기 위해서 역사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35년 동안 이어진 일제강점기,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까지. 지금의 한국사회는 숨 가쁘게 이어져 온 근현대사가 남긴 상흔 위에 존재한다. 그 시대에 쓰여진 이야기를 읽고 보는 것은 종종 고통스럽지만, 지금 이곳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XXL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 '나는 살인자입니다' 등의 작품으로 동시대 이슈를 꾸준히 무대 위에서 다뤄온 극단 돌파구는 올해부터 '고전의 미래'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기획한다. 고전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겠다는 취지로,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공연되는 <고목>은 그 첫 번째 작업이다. 함세덕 작가가 1947년 발표한 이 작품은 혼란스럽던 해방기를 배경으로 마을 지주인 '거복'과 그의 집에 있는 오래된 나무를 통해 사람들 간의 세대갈등과 계급갈등, 이념갈등 등을 첨예하게 그려낸다.

 

근대 작품이라 하면 어두운 내용이 연상되지만, <고목>은 갈등을 겪는 와중에도 희망을 간직한 인물들이 나온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2024년의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 지난 18일, 전인철 연출을 만나 돌파구의 <고목>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전에서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발견하다


 

[극단돌파구] 2024 고목_연습사진 007.jpg

<고목> 연습사진 ©극단 돌파구(사진: 이지수)

 

 

반갑습니다. 연출님과 극단 돌파구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연극 연출을 하는 전인철입니다. 극단 돌파구를 10년째 운영하며 주로 청소년, 젠더, SF를 주요 소재 삼아 작업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은 동아시아 SF소설을 무대화하는 ‘우주극장’ 시리즈, 젊은 희곡작가와 협업해 동시대 한국 사회의 이슈를 창작희곡으로 만드는 ‘오늘의 희곡’ 시리즈를 작업해 왔어요. 올해부터는 옛 희곡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날 한국사회를 함께 돌아보는 ‘고전의 미래’ 시리즈도 이어나가려 합니다. <고목>은 그 첫 번째 작업이에요.

 

 

<고목>은 어떤 연극인지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고목>은 오래된 나무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해방 직후라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사람들 간의 첨예한 갈등을 다루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적이었던 화두로, 자본주의의 끝에 다다른 2024년에 함께 이야기 나누기 좋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돌파구의 주요 작업 소재였던 청소년, SF, 우주 등은 모두 ‘미래’라는 키워드에 어울리는데요, 이번에 ‘과거’의 희곡에 새롭게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번에 우리나라 옛 희곡들을 다시 읽으며 우리나라 연극사에도 새롭게 만들어야 할 작품이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대부분 우리나라 근대희곡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월북작가 해금 전까지는 출판 자체가 금지된 작품도 많았고요. 서양의 고전이 활발하게 무대화되고 호의적인 시선을 받는 걸 생각하면 아쉬웠죠.


무엇보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되는 과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극을 더 많이 연구하고 무대화한다면 분명히 연극계에 중요한 자산이 될 거라고 믿어요. 앞으로 <고목> 외에도 좀 더 작품 개발을 해보고 싶습니다.

 

 

함세덕은 그동안 많이 다뤄지지 않은 작가인데,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맞아요. 함세덕은 친일과 월북 행적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금지되다시피 했던 작가였어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940년대에는 국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친일연극을 했고, 해방 후에는 남한에서 좌익연극이 금지되자 월북을 했죠. 이후 6.25전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어요.


같은 연극인으로서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기 친일과 월북을 하면서도 연극을 계속하려 했다는 데 관심이 갔어요.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연극을 했을지 궁금해하며 작품을 하나씩 읽었습니다. ‘고전의 미래’ 시리즈 역시 <고목>을 읽고 기획하게 되었어요.

 

 

 

2024년에 새롭게 읽는 1947년의 <고목>


 

[극단돌파구] 2024 고목_연습사진 024.jpg

<고목> 연습사진 ©극단 돌파구(사진: 이지수)

 

 

2024년에 <고목>을 새롭게 무대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고목>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해방기예요.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큰 희망을 품고 독립을 맞이했는지 알 수 있어요. 정말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작중 인물들은 비관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미래를 꿈꾸거든요.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났는데, 신기하게도 그때의 현실에서 지금의 현실이 상당 부분 겹쳐 보이더라고요. 그런 작품을 새롭게 무대에 올린다면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의 현재를 점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어떤 미래를 살아야 할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지금의 현실이 겹쳐 보였는지도 궁금합니다.


<고목>에서는 세대갈등과 이념갈등이 두드러지는데, 그 갈등의 양상이 지금과 비교해도 크게 낯설지 않아요. 이 두 가지 갈등이 정말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발목을 잡아 왔음을 알 수 있죠. 큰 전염병이 휩쓸고 간 이후라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세상에 살고 있다면, <고목>에서는 콜레라가 퍼지고 대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또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전쟁난민 이야기가 활발한데, <고목>에도 전쟁난민 이야기가 다뤄져요. 이들은 주로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으로 강제 이주한 경우로,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한국을 떠나는 사람도 많았죠. <고목>에서 묘사되는 전쟁난민과 오늘날의 전쟁난민을 엮어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거예요.

 

 

2024년에 읽는 <고목>은 연출님에게 어떤 작품으로 다가왔는지도 들어보고 싶어요.


극중 ‘하동정’이라는 인물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큰 기대를 걸고 연설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 장면 때문에 이 작품이 조금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제가 학생일 때는 이런 작품을 읽는 것 자체가 금기였으니까요. 좀 더 읽다 보니 그 후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는 입장으로서 지금의 우리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뜨거웠던 구호는 실패하고 우리는 이들이 꿈꾸던 것과는 다른 미래를 맞이했는데, 앞으로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죠.


한편으로는 <고목>이라는 작품을 비평하며 작품에 담긴 이념에만 초점을 맞추기는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주목할 부분도 많은 작품이기 때문이죠.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다뤄졌던 작품이지만, 이제는 다른 측면도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아요. 들여다보면 재평가될 요소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을 재평가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만 꼽자면, <고목>에서 그려지는 여성상이에요. 이 작품에는 수국, 진이, 거복의 처, 그리고 거복의 노모까지 주관이 강한 여성 인물들이 주체로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며 갖게 된 각자의 신념을 분명하게 표현하지요. 근대문학 속 여성은 수동적일 거라는 편견을 깨는 부분이에요. 함세덕 작가 작품의 이러한 요소는 다시 평가받고 또 새롭게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는 연극을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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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 연습사진 ©극단 돌파구(사진: 이지수)

 

 

<고목>을 무대에 올리며 연출로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여성이나 전쟁난민처럼 사회적 소수자, 소외된 삶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면서도 ‘세대갈등’과 ‘연대’, ‘나누는 삶’ 등 중요하게 읽혀야 할 화두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특히 거복의 생각 변화를 잘 드러내려 해요.

 

 

관객은 무엇에 주목하여 <고목>을 감상하면 좋을까요?


<고목>은 인물 형상화가 매력적인 작품인데, 특히 주인공인 거복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에요. 거복이 자기 집에 있는 고목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다른 사람과 갈등하며 이야기가 전개되지요. 이 나무를 둘러싼 거복의 생각 변화와 함께 그가 펼치는 논리에 주목해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오각하’를 맞이하는 군중의 소리를 녹음된 음성으로 처리하지 않고, 20명의 코러스를 극장 2층에 배치해 직접 소리를 내도록 연출한 것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연극이란 극장 무대에서 직접 이루어지는 게 많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연출을 시도했어요. 새 시대에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육성을 현장에서 직접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연극을 하며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2024년의 연출님이 생각하는 ‘돌파구의 스타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돌파구의 10년은 함께해준 스텝과 배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앞으로도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몇몇 소수가 주도하는 연극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평등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연극이요.


배우가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는 연극을 시도하는 것도 그 일환이에요. 이야기 속에서 대사가 적고 비중이 없는 인물일지라도 실제 연극을 할 때 퇴장하지 않고 무대 위에 계속 남아 있다면 관객은 그 인물을 의식하게 돼요. 단역이라도 그의 삶의 어떤 부분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죠. 그런 연극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 자체에는 주인공이 정해져 있을지라도, 무대 위에서만큼은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목> 이후 예정된 돌파구의 공연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올해는 두 작품이 더 예정되어 있어요. 우선 8월에 영국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의 ‘The Children’을 공연합니다.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이후 벌어지는 세대갈등이 중심이 되는 작품입니다.


10월에는 LG아트센터 유플러스 스테이지에서 '지상의 여자들'을 공연합니다. 박문영 작가의 소설이 원작으로, 도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작품이에요. 작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한번 선보인 후 다시 관객을 찾아갑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목>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분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옛 작품이라 고루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작품이에요. 공연을 만드는 저희도 처음에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작품과 함께 당시 시대상을 공부하며 그때 그 사람들이 어떤 꿈을 꿨는지 상상하다 보니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극장을 찾아 작가가 쓴 이야기의 힘을 느끼고, 그걸 무대화하는 돌파구의 표현 방식도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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