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영원을 순간으로, 점을 선으로 만드는 연극 - '언덕의 바리' 김정 연출

글 입력 2024.01.3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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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한 여성이 폭탄 투척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된다. 그 이름은 안경신, '여성폭탄범'으로 불리던 사람이다. 임신한 몸으로 무장독립운동에 기여했다가 출소 후 세상 속으로 사라진 그가 100여 년 후 연극 <언덕의 바리>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났다. 고연옥 작가, '극단 동', '프로젝트 내친김에'가 함께한 이 작품에서 안경신은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역사 속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현재와 호흡하고 연결되는 한 편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실존인물을 다룬다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손님들>, <처의 감각>, <인간이든 신이든>으로 고연옥 작가와 호흡을 맞춰온 김정 연출에게도 <언덕의 바리>는 특히 도전이 필요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여러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그는 우리 앞에 '살아있는' 안경신을 불러오는 데 성공했다. 지난 22일 김정 연출을 만나 '거친 불씨' 같았던 <언덕의 바리>, 그리고 그가 오래 몸담은 연극이라는 매체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안경신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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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바리> 첫 공연이 지난 14일 마무리되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공연 준비로 연말 연초에 못 쉬어서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중이에요. 보통 다른 작업은 끝내고 나면 마음이 허할 때가 많은데, 이번 작업은 준비하면서 걱정이 워낙 많았기에 오히려 마치고 마음이 편했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걱정이 많았나요?

 

일단은 실존 인물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처음이라 부담이 있었죠. 그건 살아있던 한 사람을 무대 위에서 새롭게 살려내 다시 만나는 일이니까요.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잘못해서 표현이 얕아지는 건 아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극단 동, 고연옥 작가님과 함께하는 작업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쉽지 않은 작업이었어요. 극단 동은 30년 가까이 활동해 왔기에 배우들 각자의 방식과 개성이 뚜렷했어요. 연출로서 그걸 파악하고 같이 극을 만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고연옥 작가님과의 작업은 네 번째지만 이번 작품을 하면서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저는 시적이고 문학적인 인물 및 장면을 표현하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인데, 이번 작품은 실존 인물이 나오는 만큼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전형적인 장면이 많았거든요. 그걸 어떻게 작업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 만큼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보다 ‘여기까지 해야겠다’ 정리하는 게 더 중요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욕심내지 말고 우리가 아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고 나서야 마음이 좀 편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평소 작업할 때보다 배우들의 직관에 더 많은 걸 맡겼어요. 원초적인 순간들을 잘 살리려 했죠. 평상시 저는 비유하자면 잘 타올라 재까지 예쁘게 남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데, 이번 작품은 불씨 그 자체 같았어요. 더 거칠고, 거침없고, 날 것에 가까운 작업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연출님이 발견한 안경신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의 위대한 업적으로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어요. 하지만 안경신은 엄밀히 말해 거사에도 실패했고 이후 남아 있는 기록도 많지 않죠. 대본을 읽었을 때 가장 꽂혔던 것도 안경신이 출소한 후 눈이 보이지 않는 아들과 세상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내용의 마지막 세 줄이었어요. 


안경신의 사라진 행적을 생각하다가 문득 저희 동네에 계시는 할머니들이 떠올랐어요. 운동을 하러 길을 왔다갔다하시는 그분들을 볼 때면 종종 저분은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저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어쩌면 안경신이 저 할머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그 연결고리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어요.


물론 현실적으로 안경신이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있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제가 매일 보는 할머니의 어머니가 3.1 운동에서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이거나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독립운동가를 도왔을지도 몰라요. 할머니에게 아들이 있다면, 또 그 아들에게도 아들이 있다면 저와도 연결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경신의 역사가, 혹은 그 모든 그 시대에 존재했던 그 사람들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다 녹아 있는 거예요. 그 부분이 흥미롭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안경신은 자취를 감췄지만, 그가 품었던 불씨는 우리에게도 남아 있죠.

 

 

 

격렬한 삶 뒤편의 갈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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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무대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공연 장소는 대극장이었지만, 무대에 관객석을 설치해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소극장처럼 가까워졌죠.


<언덕의 바리>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이상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단순한 설명이나 재현이 아니라 저 사람이 지금 가까이에 살아있다는 감각이 필요했지요. 과거에 살던 사람이지만 동시에 언제든 나한테 다가와서 나를 만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요. 그래서 무대와 객석은 가까워야 했고, 배우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 역시 관객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요.

 

 

반면 원래 관객석이었던 곳은 갈대밭으로 꾸며 무대의 일부로 활용했습니다.


그 공간이 관객에게도, 극중 인물에게도 편안한 느낌으로 존재하기를 바랐어요. 사실 관객은 불편할 거예요. 디귿 자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서로를 마주 봐야 하고, 무대도 너무 가깝고, 무대 바닥은 너무 현대적이라 시대적 배경과 잘 어울리지도 않거든요. 그럴 때 저 너머를 보면 갈대밭이 있어요. 본무대와 대조적인 그 풍경을 보며 저기로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게 갈대밭의 목적이었습니다.

 

 

원래 대본에도 ’갈대밭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나요?


대본에는 그냥 ‘물이 찾아오는 언덕’이었어요. 언덕인데 물이 찾아온다니, 중력을 역행하는 판타지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이었죠. 대본에는 모든 인물이 각자의 이유로 언덕을 오른다고 되어 있어요. 작업을 하며 언덕이 뭘까 계속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확실하게 말 못 하겠어요. 그렇지만 그 정서는 고향에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갈대밭을 생각해냈고요.

 

 

관객만이 아니라 인물에게도 그 갈대밭은 의미가 커 보였어요. 


디자이너와 갈대밭을 구상할 때 이 갈대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의논했는데, ‘쉼’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일제강점기 테러와 학살이 벌어지던 세상 한중간에서 안경신을 비롯한 인물들이 원했던 건 평온한 고향의 풀 냄새와 바람이라고요. 인물들이 격렬하게 부딪힐 때도, 안경신이 목표를 위해 미친 사람처럼 돌진할 때도 그 뒤편에는 언제나 갈대밭이 펼쳐져 있지요. 때때로 관객은 인물들에게 그냥 “저기로 가!”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갈대밭은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기도 해요. 최종적으로 완성된 무대에 조명을 비추는 순간 뭉클할 정도로 좋더라고요. ‘됐다’ 싶었어요. 

 

 

<언덕의 바리>에는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안경신을 제외한 다른 인물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인물이 있을까요?

 

일제의 앞잡이였던 ‘현강’이요. 강세웅 배우가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복합적으로 표현해 줬어요. 나중에는 현강이라는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모든 인물은 각자의 이유로 언덕을 오른다면, 저 사람의 언덕은 뭘까 싶었죠.


물론 당연히 그의 친일 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가 격동의 한국 사회를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죠. 안경신에게서 주변의 할머니를 떠올렸듯 그에게서 한 시대를 살아낸 노인이 보였어요. 그렇게 온갖 사람들이 모이고 다 섞여서 여기까지 왔고, 그 총체야말로 우리의 근현대사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진짜 같은 거짓말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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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연극이라는 매체에 관해서도 연출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한태숙 연출님의 <레이디 맥베스>를 본 이후 연극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게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때 본 <레이디 맥베스>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정도의 충격이었어요. 연극에서 가끔 그런 순간을 만나요. 하지만 그 이후로도 사람들이 왜 하필 다른 게 아니라 연극을 하느냐고 물으면 바로 답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답할 수 있어요. 연극만큼 순간을 영원히 강렬하게 간직하게끔 해주는 매체는 없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순간은 돌아갈 수 없기에 오히려 영원히 존재해요. 저는 <레이디 맥베스>를 봤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요. 그런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지죠. 인간은 좋았던 순간을 계속 곱씹으며 그 느낌을 더 부풀리거든요. 내가 척박할 때 자꾸 그걸 꺼내보고요. 마치 남자들의 과장된 군대 이야기가 그러하듯이요. 그렇게 순간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연극이 주는 순간의 체험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강렬해요.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일 수도 있죠. 극장에서 그걸 경험하면 절대 잊을 수 없어요. 그러니 광적인 관객과 매니아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시대의 연극은 오히려 애매하게 가지 말고 더 매니악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야지만 다시 살아날 것 같아요.

 

 

그럼 연출님이 생각하는 ‘좋은 연극’이란, 그렇게 순간의 강렬한 체험을 주는 연극일까요? 

 

그렇다기보다 연극이라면 그러한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연극이란 그런 순간들로 가득 찬 것이겠죠. 그런 작품은 배우의 몸짓과 눈빛, 대사만이 아니라 소품 하나까지 살아있어요. 그래서 진짜 좋은 연극의 장면들은 사진으로만 봐도 멈춰 있거나 죽어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게 느껴져요.

 

재미있는 건 연극이 사실은 100% 거짓말이라는 것이에요. 갈대밭도 가짜 풀로 꾸며놓고 갈대밭이라고 말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 가짜를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두고 정말 많은 사람이 세세한 노력을 기울여요. 그러면 죽어있는 것들도 실제로 살아있는 것 이상으로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대 위에 조성된 인공 갈대밭을 보며 그걸 갈대밭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화와 낙원이라는 개념까지 불러올 수 있지요.

 

 

조연출로 계셨던 기간까지 합치면 15년가량 연극계에 계셨는데요, 그 시간을 지나며 생긴 작업 철학이 있을까요?

 

어떤 작업이든 ‘이 정도면 괜찮네’ 정도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그렇게 해본 적도 있는데 끝내 아쉬움이 남아서 공연이 끝나고도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정말 만족스러운 작업은 그냥 보자마자 확신이 들어요. 무릎을 ‘탁’ 치게 되죠. 그 순간은 그냥 찾아오지 않아요. 괴로워하고 내내 고민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만나게 되죠. 


또 한 가지는, 연극은 무대라는 특수성을 가진 매체라는 걸 계속 생각하려 해요. 매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일수록 무대만이 가진 특성을 놓치지 말자고요. 수년 전부터 농담 삼아 올드스쿨이고 촌스러운 거 하고 싶다고, 연극은 언어가 생기기도 전부터 있었던 거라 올드스쿨이 아닐 수가 없다고 말하며 다녀요. 그러기 위해서 제 스스로 연극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야겠죠.

 

 

앞으로 연출로서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주로 지금까지 안 해봤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에 끌려요. 다른 연출이 해도 잘할 것 같은 작업보다 제 상상력을 많이 발휘할 수 있는 작업에 흥미가 생기고요. 예를 들어 저는 종종 작품에서 움직임을 줄여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렇게 할 바에는 아예 움직임 없는 공연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죠. 


새로운 관객층도 만나보고 싶어요. 평소 제 공연은 연극을 공부하거나 원래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니는 관객분들이 많이 보시는 것 같은데, <태양>이 제 작업 중에는 비교적 대중적인 편에 속하다 보니 그때 새로운 관객층을 만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일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올해 예정된 공연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가까운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2년 전 낭독공연으로 올렸던 와즈디 무아와드의 <연안지대> 공연이 6월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또 국립극단 창작공감에서 <모든>이라는 작품에 연출로 참여하는데, 하반기에 공연이 올라갈 거예요. <처의 감각> 일본 작업도 할 예정이고요. 연말에는 <붉은 웃음>을 작업합니다. 레오니트 안드레예프가 쓴 러일전쟁 배경의 소설인데,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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