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용서는 그런 게 아니다 - 진실과 회복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진실과 회복> 리뷰
글 입력 2024.03.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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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루이스 허먼 <진실과 회복>, 북하우스]

 

 

이 책의 표지가 눈에 띈다. 책의 표지를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단정하게 나열된 글자들 아래로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곡선의 형태가 느껴진다. 눈여겨 보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로 희미한 곡선, 그러나 조심히 쓸어내리면 곡선의 입체감이 손끝에서 존재감을 발하며 '사실은 나 여기 있어요'하고 말을 걸고 있었다. 창백한 살갗 위의 아물었으나 지워질 수는 없는 흉터, 바로 상처의 곡선이다.


트라우마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이 책의 저자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이 <진실과 회복>에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생존자들을 위한 정의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약 300쪽의 분량 동안 설파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생존자, 즉 생존자는 근친 성폭력, 강간, 가정폭력 등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겪은 당사자인 동시에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을 뜻한다. 이른바 우리가 '피해자'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야기할 생존자 정의와 그 목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이들의 회복에 집중하고 있다. 그에 존중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이들을 '생존자'라 부르겠다. 그들이 피해를 겪은 것은 사실이나, 그 피해사실만이 그들의 정체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권력], [정의의 비전], [치유]의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마다 3장의 하위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권력]에서는 [1장 독재의 규칙]을 통해 독재가 어떤 행위와 규칙 아래 실현되고 그로 인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2장 평등의 규칙]에서는 앞선 장의 독재와 반대되는 상생과 호혜의 권력관계에 관해 설명하며 대조시킨다. [3장의 가부장제]는 오랫동안 전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대표적인 독재의 형태로, 이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한다.


이러한 1부의 구성은 후에 계속해서 언급할 생존자를 위한 정의를 이해시키기 위한 사전설명이다. 앞의 장들이 개념설명 위주였다면 이윽고 이어지는 [2부 정의의 비전]은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의 주제인 생존자 정의를 위한 조건들을 보다 더 세부적으로 탐구한다. 2부의 [4장 인정], [5장 사죄], [6장 책임지기]가 이러한 조건들이다. [4장 인정]은 가해자의 가해사실 인정뿐만 아니라 생존자를 둘러싼 공동체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생존자의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해 준다는 포괄적인 인정이다. [5장 사죄]는 생존자들이 가해자 및 방관자의 사죄를 통해 스스로에게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에 대한 분석과 함께 용서의 새로운 개념 또한 제시해 준다. [6장 책임지기]는 가해자 개인만의 책임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책임까지 논하고 있다. 4~6장 모두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를 포함한 공동체의 유책 또한 강조하고 있단 점에서 독자 모두가 생존자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게 한다.


마지막 [3부 치유]에서는 사회에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 현대의 사법 재판이 가지는 한계점을 지적하고, 그를 보완할 수 있는 추가제도 및 대안들의 사례를 소개하고 비교한다. 생존자를 위한 정의가 적극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개선되어야 할지, 일전의 제도가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분석하며 생존자 정의 실현방법을 모색한다. 특히 3부의 [7장 배상], [8장 재활], [9장 예방] 중, [8장 재활]은 가해자가 다시 윤리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찰한다는 점에서 2부에서 강조했던 공동체의 책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생존자 정의란 무엇일까.

 

생존자 정의는 말 그대로 생존자를 위한 정의다. 생존자를 위하려면 당연히 생존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복수 혹은 응징', '적절한 형량', '생존자의 고통을 충분히 고려한 배상'과 더불어 '가해자를 향한 대중의 분노' 등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생존자 정의에 있어서 완전히 불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본질은 아니다. 이 책에 인용된 인터뷰와 사례들을 보았을 때, 생존자들이 공통으로 외치는 요구는 '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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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존중을 표하는 자세, '경청'


 

인정은 앞서 포괄적인 인정이라 언급한 가해자의 가해사실 인정, 공동체의 사건인지와 더불어 생존자의 고통에 깊은 공감과 공동체의 가해 공모 및 2차가해와 방관에 대한 인정, 무너진 사회의 신뢰를 함께 회복시킬 책임에 대한 자각 또한 포함되며,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가해행위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생존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까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까지 포함된다. 생존자가 요구하는 이러한 인정을 위해선, 먼저 생존자가 겪은 피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진심 어린 사죄와 공동체의 유의미한 책임 발휘가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생존자에게 공감해 주는 것 또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언론사나 제3자가 전달하는 요약되거나 때때로ㅡ어쩌면 꽤 자주ㅡ편향적인 문장으로는 부족하다. 생존자 자신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능동적으로 말할 때만이 우리는 그의 가감 없는 슬픔과 수치심, 무력감, 분노, 상처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발화시기와 공간이 한정되어 있고 생존자의 발언기회를 '허락해 주는' 법정 증언과는 다르다. 발화를 위한 시간, 장소, 전달방식을 생존자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발화의 목적이 입증이 아닌 생존자 스스로에게 있는 주체적인 말하기가 인정과 함께 생존자가 요구하는 바람이었다. 이는 책의 서론에서 회복의 단계로 언급한 생존자의 능동감 회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주체적인 말하기가 효과를 보려면 그에 맞는 경청이 필수로 요구된다. 너나우리인 공동체는 생존자를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 아래에서 특히 성폭력, 가정폭력의 생존자들은 2차가해에 시달리기 쉽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편견을 내려놓고, 생존자의 말을 섣불리 곡해하려 들지 않는 진지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

 

 

 

자비와 자애가 아닌 '내려놓다'의 용서


 

앞서 소개했던 2부의 [5장 사죄]에 대해서 기억하는가? 이 사죄의 장에선 생존자가 원하는 사죄의 태도ㅡ가해자의 사죄를 원하지 않는 생존자 또한 있다ㅡ와 생존자들의 사죄에 대한 각기 다른 의견, 그리고 용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전에서 사죄란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빎"이라 정의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의 사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죄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 생각하는 일반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사죄는 생존자들 모두가 필수로 요구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생존자들은 가해자를 향한 분노, 보복심보다도 자신의 회복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가해자를 향한 복수심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이 우려하는 생존자의 '삐뚤어진' 분노(감정에 못 이겨 사회의 약속을 모두 저버릴 만큼의 강렬함)는 대개 생존자들에게 많이 보이는 것은 아니나, 분명히 그러한 불씨는 있었다.*

 

하지만 타오르는 복수심에 빠져있는 동안 생존자에게 찾아오는 것은 쾌감이나 해소감이 아닌 고통과 피로였다. 그들은 과거의 피해사실을 부정하지 않되,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피해사실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며, 새로운 정체감을 형성하고, 자신의 안전과 신뢰를 깨뜨린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고 끔찍한 비극이 세상에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원한다. 가해자의 사죄를 원하는 생존자든 원하지 않는 생존자든 그들은 종국에는 가해자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의 사죄는 생존자들에게 필수조건이 아니었다. (반면, 가해자의 가해사실 인정은 이 책에 실린 생존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요구했다.)


*그러나 책에서는 가해자를 향한 복수심을 포함한 분노 자체가 그른 감정이 아니며, 마땅히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언급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이 올바르게 발산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의 책임과 노력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실제로 생존자들이 과하고 격정적인 복수심과 응징 욕구에 집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생존자가 이러한 복수심에 사로잡혀있을 거란 대중의 우려는 하나의 편견일 수 있음을 얘기한다.

 

가해자의 사죄가 생존자들이 반드시 요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용서'는 어떠할까. 가해자의 사죄가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 사죄에 대한 응답인 용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답은 아니다. [5장 사죄]에 실린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생존자들은 각기 다른 의미의 용서를 필요로 했다.


용서의 다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용서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려보자. 많은 목사들과 성경이 묘사하듯, 용서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주어라"의 자애로움과 자비베풂의 성인(聖人)의 영역일 수도 있다. 혹은 죄를 사해주는 면죄나 과거를 덮고 넘어가 준다는 망각의 영역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장의 생존자들은 용서를 가해자에게 선사해 주는 행위가 아닌, 본인에게 내려주는 해방감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생존자들은 용서란 용서받을 대상인 가해자가 자신의 앞에 없거나, 애초에 가해자가 용서를 빌지 않았음에도 독단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이라 이해한 것이다. 용서의 결과가 해방감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용서는 최고의 복수"라며 생존자에게 해방감을 빌미로 사면과 자비를 종용하는 치들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용서'는 스스로에게 행하는 것이다. 생존자의 앞으로의 인생에 그리 중요하지 않을 가해자에게 내려주는 선물 같은 게 아니다. 이 생존자의 용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지아니니의 사례를 인용한다.


 

"범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것이 달라진 듯하다. (…)

'내가 지쳐 있었구나, 감정적으로 지쳐 있었구나, 불안, 울분, 분노의 방향을 범인에게 고정시키는 데 지쳐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가 범인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더 건강해졌고 더 행복해졌다.

그것을 용서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르겠다."

 

 

또한 이 책에서는 용서를 "모든 자기 비난을 내려놓고 마침내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는 과정", "가정폭력 생존자 메리 윌시의 표현대로, '용서한다는 것은 더 좋을 수 있었을 과거에 대한 모든 희망을 접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희망을 접는다는 표현은 자칫 비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메리 윌시의 표현에서 "더 좋을 수 있었을 과거"에 좀 더 집중해 보고 싶다.

 

더 좋을 수 있었을 거란 표현은 가능성을 뜻한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회상할 때 '더 괜찮은 수가 있었을 텐데', '더 나아질 수 있었을 텐데', '더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며 과거의 가능성에 대해 종종 후회한다. 그리고 이러한 후회는 필연적으로 자책으로 이어졌음 또한 숱하게 확인했을 것이다. 과거가 더 좋아질 수 있었을 거란 희망은 과거의 나에게 상황을 바꿀만한 여지가 있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결국에 더 좋아지지 못했다는 건 '과거의 내가 실행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선택을 했거나', '상황을 충분히 바꿀만한 제3의 조력자가 있었으나 내가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재해나 사고를 겪었을 때, 그때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며 자신을 질책하던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전혀 그럴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이 일의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떳떳하게 말해줄 것이다.

 

사람이 저지른 가해행위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생존자는 공포, 당황스러움, 혼란이란 제한된 감정환경에 있었고 이는 몸이 포박되지 않더라고 충분히 사람의 행동을 묶어버리는 제약이 된다. 가해자가 친밀한 관계거나 상사나 선생, 부모·조부모·손위형제와 그 외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관계의 누군가였다면 심리적으로도 위축된다. 설령 당시엔 반항심이 들었더라도 이후에 손상될 인간관계와 소속환경, 경제상황 등을 생각하면 행동으로 직접 옮길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생존자는 당시 현장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과 심리적·물리적 자유가 없었다. 그리고 앞의 조건들과 상관없이 가해행위에 있어서 책임은 온전히 '가해자'에게 있다. 과거가 더 좋아질 수는 없다. 과거가 좋아지는 건 당시 생존자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가해자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생존자는 그 상황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존자를 향한 책망을 손쉽게 마주칠 수 있다. 이 글에서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 생존자를 향해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더라도 무단으로 뿌려진 생존자의 신상을 보며 그를 판단하려 들거나, 정체성을 피해사실과 연관 지으려 드는 것 또한 생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2차가해 방식이다. 이 <진실과 회복>에서 계속해서 언급하는 윤리적 공동체의 책임이 오히려 굴절되어, 생존자에게 떠맡겨지고 있는 것이다.

 

*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진실과 회복>을 통해 윤리적 공동체의 책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생존자를 안정적으로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도, 가해자의 가해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재활'을 통해 가해자의 손상된 윤리관을 회복시키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후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을 위해 힘쓰는 것도 우리 공동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가해행위를 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적인 가해행위를 했든 하지 않았든 '침묵'도 생존자에게 상처를 주는 폭력이며, 설령 완전무결할지라도ㅡ애초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ㅡ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윤리적 공동체를 꾸리는 것으로부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생존자를 '완전한 타인'으로 배제하는 일은 우물에 독을 타는 격이다.

 

안타깝게도 생존자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할 또렷한 방법은 아직 없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책을 통해 생존자 정의를 추구한 여러 대안들을 소개해 주고 있으나, 그 대안들이 반드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생존자의 회복에 도움을 줬으나, 가해자는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과정 중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적지 않은 시간과 감정소모를 필요로 해 널리 적용하기 어렵다는 한계점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과 회복>은 계속해서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들은 생존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언어로 들어볼 수 있었다. 필요한 재료들은 모두 제시해 주었다. 이제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생존자의 회복은 생존자 개인의 해방감뿐만 아니라 깨진 공동체의 신뢰를 재구축해 이 사회가 안전한 공동체임을 다시 확신하게 해주는 것까지가 회복의 단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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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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